주례 유감(主禮 有感)_2 (169회)
  제20장 수상(隨想)1

셋째로는 일본에 가서 주례를 맡은 경우이다. 평소 내왕이 있었던 일본 거주 교포(僑胞)인 한송출(韓松出) 센트럴그룹 회장의 맏따님의 결혼 주례를 서게 되었다. 한(韓) 회장은 일본 시코쿠(四國) 고치시(高知市) 실업계(實業界)에서 실력자로 알려져 있는 분인데 고향이 경남 합천(慶南 陜川)이다. 일본에서 출생하였으니 2세 교포이고 신부는 3세 교포이다.

당시 오사카총영사관(大阪總領事館)의 부영사(副領事)로 근무 중이던 이남교(李南敎) 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수년간 교분을 맺고 오는 중에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애국자라는데 감명을 받았다. 한(韓) 회장은 생각한 바 있어서 한국국적(韓國國籍)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소위 조총련(朝總聯)에 대하여는 결사적으로 대항한다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관계로 받는 수모나 손해도 많지만 꿋꿋하게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나가겠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조총련(朝總聯)이 방해할 때마다 이 정신은 더욱 강해져서 모든 어려움을 뿌리쳤다는 이야기다.

가끔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모국을 방문하곤 하였는데 1988년 12월 초에도 서울에 와있었다. 마침 개각설이 나돌고 있을 때여서 나의 거취가 몹시 궁금했던 것 같았다. 귀일(歸日) 일자를 연기하면서까지 개각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2월 5일 개각이 발표되었고 나는 보사부장관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아침 10시에 조촐하게 이임식을 마치고 돌아오니 한(韓) 회장으로부터 위문전화가 왔다. 다음날 함께 골프를 치자고 한다.

약속대로 다음날 아침 한(韓) 회장과 그의 일본인 친구 2명과 함께 로얄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쳤다. 그 동안 수고가 많았다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끝에 자기 딸의 결혼식이 내년에 있는데 꼭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렇게 하기로 가볍게 약속을 했는데, 이것이 주례로까지 발전할 줄은 몰랐다. 그 후 결혼식이 89년 5월 9일이라는 것과 주례를 꼭 맡아줘야겠다는 연락이 몇 차례 왔다. 5월 8일, 집사람과 함께 오사카(大阪)을 경유해서 고치시(高知市)에 갔다. 경관이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 고치(高知)는 처음부터 인상적이었다.

시코쿠(四國) 지방에는 처음 갔는데 산과 바다가 무척 훌륭했다. 도착 당일 저녁에는 한(韓)회장 가족과 함께 저녁을 들었다. 모친과 백형은 참석을 못하셨고 4형제분 내외들과 매(妹)씨와 자리를 함께 했는데 이 분들이 사업을 이끌고 나간다는 것, 그리고 우의가 돈독하여 이 지방에서 평판이 자자하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다.

결혼식은 다음날 4시에 내가 묵고 있던 신한큐(新阪急)호텔의 예식장에서 있었다. 예식장은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고 소위 신주(神主)가 주재한다. 신랑 신부와 매작인(*바이샤쿠닌 媒酌人)(우리나라의 중매인) 내외가 중심이 되고 양가의 가족이 양쪽에 자리 잡는다. 이색적인 것은 신부가 일본 기모노를 입지 않고 치마저고리로 단장한 모습이다.
 
결혼식은 약 30분 동안 진행되었고 신랑 신부와 매작인(媟酌人) 내외는 신주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었다. 양가의 가족도 남자는 예복 여자는 치마저고리였다. 주례(主禮)인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모닝코트를 입었다.

오후 6시에 같은 호텔 대연회장에서 피로연이 열렸다. 하객이 먼저 입장하여 테이블에 착석한 후 매작인(媟酌人), 신랑, 신부, 매작인 부인(媟酌人 夫人)의 순서로 입장한다. 장내는 컴컴하게 되어 있고 일행이 안내원의 안내로 입장하는데 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비춰준다. 이 때 신랑은 흰색 예복(禮服),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착용한다. 안내되는 대로 네 사람이 단상에 마련된 자리에 착석하니 장내가 대낮같이 조명된다. 500여 명이라고 알고 있는 하객들은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단상의 인물들을 쏘아보듯 하였다.

이윽고 텔레비전 고치(高知) 남녀 아나운서의 사회로 피로연이 시작되었다. 먼저 주례(主禮)인 나의 약력을 소개하고 신랑, 신부 소개와 축사를 해줄 것을 부탁한다. 나를 포함한 단상의 4인이 기립한다. 나는 먼저 한국말로 하고 일본말로 통역하겠다고 했다. 1인 2역인 셈이다.

신랑 박일(朴逸)군은 야마구치현(山口縣) 실업계(實業界)에서 활약 중이신 박해준(朴海俊) 사장의 아드님이고 대학을 졸업한 후 현재 부친이 경영하는 ‘에이스’회관그룹에서 일하고 있고, 신부 히로미(韓 博美)양은 한송출(韓松出) 회장의 따님이고 오늘이 있기까지 남다른 신부수업을 해왔다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평소에 내가 즐겨하는 주례사를 하였다. 한 구절씩 한국말과 일본말로 하였다. 하객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매작인(媟酌人)의 인사가 끝난 후 우리 네 사람이 착석한 다음에는 내빈, 신랑 신부 우인대표 등의 축사가 있었다. 신부의 우인대표가 눈물을 흘려서 축하의 말을 이어 가지 못했던 광경이 이색적이었다. 피로연에는 일식, 양식, 중국식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어서 문자 그대로 호화판이었다. 약 3시간 30분 동안 계속되었는데 후반에는 한국찬가의 노래와 한국무용 등이 공연되었다. 신랑, 신부 인사와 노래, 신랑, 신부의 부친의 인사 등도 인상적이었다. 피로연이 진행되는 동안에 신랑, 신부는 세 번 옷을 갈아입었다.

사업도 성공했고 한국인으로서의 존재를 과시하고 싶어서 호화판으로 피로연을 꾸몄다는 것이 신부 부친인 한(韓) 회장의 변이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무던히도 나에게 감사했다. 한국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느꼈다고까지 말하며 고마워했다.

다음날에는 세토대교(瀨戶大橋)에 가서 새로운 여정을 맛보기도 하였다. 듣던 대로 과연 걸작품이었다. 그날 저녁에 현의원, 시의원 등 일본인 유지들이 만찬에 초대해 주었는데 이 자리에서도 여러 사람이 나의 주례사(主禮辭)에 감명을 받았다고 높게 평가해 주었다.

그 다음날 즉 5월 11일에는 아시스리사키(足摺崎)라는 명소를 찾았다. 일본의 천황(天皇(이나 황실 인사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하였다. 자동차편으로 고치(高知)에서 약 4시간 걸리는 거리였는데 이곳저곳 구경하다보니 호텔에 도착한 것은 오후 9시가 지나서였다.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나온 아나운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피로연이 끝날 무렵에 사회를 맡았던 아나운서가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시간을 내기 힘들다고 완곡하게 거절하였는데도 꼭 인터뷰를 응해 주어야겠다는 주문이다. 나의 일정도 잘 알고 있었으며 아시스리사키(足摺崎)에서 돌아오는 날 밤이라도 좋겠다고 하기에 좋다고 했더니 약속대로 호텔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일행은 5명이었으며 이미 인터뷰를 위한 기기는 설치가 끝났다는 이야기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9시 반 경에 인터뷰를 하였다. 시코쿠(四國)의 소감, 한일관계 등에 관한 평범한 내용이었다.

아나운서는 피로연에서의 나의 인사가 참으로 멋있고 감명이 깊었다고 치켜 올리며 그래서 꼭 인터뷰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귀로(歸路)에 오사카(大阪)에 들러서 일본 녹십자(綠十字)의 사장 등 간부(幹部)로부터 환대를 받았는데 자연히 결혼식에 관한 이야기로 꽃이 피었다. 500명이 넘는 하객이 참석하는 결혼 피로연을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센트럴 그룹’ 한송출(韓松出) 회장의 장남인 나오키(直紀)군의 결혼식이 1991년 2월 17일 고치(高知)에서 거행되었다. 나는 장녀 때와 같이 주례인(主禮人)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신부는 경북 달성군(慶北 達城郡)이 본적이며 고베(神戶)시에 거주하는 교포 3세 하츠에(李初枝)양이다.

식장은 장녀의 경우와 같은 고치(高知) ‘신한큐호텔’이었다. 나에게는 두 번째 일이어서 어느 정도 익숙했다. 이번에는 박찬무(朴贊武) 박사 내외, 최원로(崔源老) 박사 내외, 최(崔)박사의 매형인 김진섭(金鎭燮) 장군 내외, 서울대 치대병원장을 역임한 장완식(張完植) 박사 내외, 장안회관 사장인 진교원(秦敎元)씨 내외와 자녀 두 분, 나의 처남인 정재남(鄭宰男) 청마(靑馬)여행사 사장 내외와 두 자제, 우리 내외 등 18명이 서울에서 참석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하기를 원하였지만 혼주 댁에 지나치게 폐를 끼칠 것이 염려되어 이상과 같은 인원으로 제한했다. 고베(神戶) 한국종합교육원의 원장인 이남교(李南敎)씨 내외가 합세하여 우리 일행은 20명이 되었다.

결혼식과 피로연은 장녀의 결혼 때와 비슷했지만 피로연은 더욱 호화판이었다. 3시간 반이나 계속된 피로연에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축사를 하는 사람도 더 많았고 ‘요사코이’춤이라는 춤을 많은 사람들이 추어서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회장댁으로 초대받아 밤늦게까지 즐겼다.

다음날 큐슈(九州)로 떠나 여러 곳을 둘러보고 귀국했다. 전에도 방문한 일이 있어서 생소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재미는 각별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와 관계가 깊다는 미야자키(宮崎)에서는 여러 가지로 느끼는 바가 많았다.

 
  주례 유감(主禮 有感)_1 (168회)
  교수(敎授)와 학생(學生)_1 (1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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