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차례 국제회의에 참석한 경험이 있다. 대부분은 학술회의다. 학술회의(學術會議)가 아니더라도 대학과 관련된 것이 주류를 이룬다. 실수도 많았고 일화도 많았다. 이 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① 실론(Ceylon)회의
뭐니뭐니해도 첫 번째 회의가 인상에 남기 마련인데 나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우선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경위부터 특이하다. 1954년에 우리나라에도 세계대학봉사회(World University Service) 한국지부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개신교의 중진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백락준(白樂濬) 박사가 초대회장이었고 김명선(金鳴善) 박사가 보건위원장이었다.
김봉삼(金奉三) 목사가 회장 겸 총무직을 맡고 있었는데, 이분은 초창기부터 일생을 이 단체에 바쳐온 공로자이다. 현재 김(金)목사가 회장이고 단체의 명칭도 한국대학봉사회‘로 바뀌었다. 엠버서더호텔 옆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대학생들에게 숙소를 제공해주는 등 여러 가지 장학사업을 하고 있다.
김명선(金鳴善) 박사는 우리나라 생리학(生理學)의 거목이시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대부(代父)격이었다. 자제가 나와 서울의대 동기생인 김광서(金廣瑞) 형인 까닭에 더욱 친근한 교분이 맺어졌던 것이다. 김(金)형은 해방 후 얼마 안 되서 ‘싱가포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 ‘George Washington’대학의 약리학 교수로 있었는데 자녀의 학비가 문제되어 고령에도 불구하고 미국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개업(開業)을 하고 있는 노력가이다.
김(金)선생의 권유로 세계대학봉사회(世界大學奉仕會) 한국지부 보건위원이 되었다. 가끔 세미나도 하면서 대학생 보건에 관해 논의하였다. 나에게는 대단히 유익한 단체였는데 이사진이나 간부들은 대개가 교인(敎人)이었다. 아마도 김(金)박사는 나를 교인으로 아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루는 교계에서 누구를 존경하느냐고 묻기에 김교신(金敎臣) 선생이라고 했더니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하면서 기뻐하신다.
김교신(金敎臣) 선생은 중학교 시절의 은사였지만 직접 교육을 받은 바는 없고, 그가 훌륭한 분이라는 사실은 훨씬 후에 들었다(⌜중학교시절⌟참조).
5․16 다음해인 1962년 1월에 백락준(白樂濬) 박사의 뒤를 이어 김명선(金鳴善) 박사가 회장이 되고, 나는 김(金)박사의 후임으로 보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해 5월에 세계 대학봉사회주최로 보건교육에 관한 회의가 Ceylon(지금의 Sri Lanka)의 Peradenia에서 열리게 되어 나는 처음으로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출국하기 전 날 김명선(金鳴善) 박사는 종로 한일회관에서 환성만찬회를 마련해 주셨다. 이 자리에서 나에게 기도를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나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다며 이번 여행이 성공하기를 기도했다. 아무도 부자연스럽게 느낀 분은 없었던 것 같았다. 신앙은 형식에 구애될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부터 믿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당시나 지금이나 나의 신조이다.
일제 시 중학교 시절에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었고 대학예과 시절에 만주 안동(安東)에 잠시 다녀온 일이 있었으며, 해방 후에는 미네소타대학에 갔다 온 것이 해외여행의 전부였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상당히 흥분상태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노스웨스트’항공사에서 티켓팅을 했다. 홍콩과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실론의 ‘콜롬보’로 가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실론과 국교(國交)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던 까닭에 홍콩에 들러서 비자를 얻었던 것이 생각난다. 싱가포르에서 콜롬보로 가는 편은 주 2회였다.
싱가포르에 가까이 오니 기내에서 승무원이 여권을 수집했다. 비행장에서 돌려준다는 설명이다. 비행장에서는 입국하는 승객의 이름을 부르고 여권을 돌려주며 절차를 밟도록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내 차례가 되었는데 한 구석에 가서 서 있으라는 것이다. 여행 계획상으로는 싱가포르 비행장에서 두 시간 체류하고 콜롬보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승객 전원에 대한 호명과 지시가 끝나기까지는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나는 그 동안 한 모퉁이에서 서 있어야 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윽고 출입국 관리관(出入國 管理官)이 나에게 오더니 사무실로 가자고 한다. 사무실에서도 앉으라는 말이 없었다. 불법입국을 하였으니 홍콩으로 되돌아가든가 유치장 신세를 지든가 한 가지를 택하라는 이야기다. 완전히 죄인 취급을 한다. 비행기표와 초청장을 제시하였다. 콜롬보행 비행기는 2일 후에나 있다는 것이다. 항변했지만 막무가내다.
‘노스웨스트’항공사에서 잘못을 저지른 것이 분명하다. 초청장을 읽더니 정말로 의과대학 조교수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맹장염에 관하여 설명해 보라고 한다. 아는 대로 설명했더니 “가짜는 아닌 것 같구먼”하며 다소 태도가 누그러졌다.
상관(上官)이 와야 최종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하며 의자에 앉으라고 한다. 천정에 달린 선풍기가 다소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였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에야 상관이 왔다. 부하직원이 비교적 상세하게 보고한다. 이야기를 듣고 나더니 항공사(航空社) 직원을 호출하라는 명령이다. 약 30분 후에 직원이 왔다. 항공사에서 잘못된 것이니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옥신각신한다. 타이프라이팅된 증명서를 수교하여 2일 후에 오라고 한다. 여권은 그때까지 보관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겨우 비행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근처의 허술한 호텔에 투숙했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다음날 개회식이 있는데 참석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 다음날 토의에도 참가하지 못한다는 것 등의 걱정이었다. 나에게는 처음 국제회의(國際會議)이고 아무런 경험도 없었던 처지였기 때문에 항공사에 숙박비를 물리게 하는 것도 모를 정도로 순진했다. 어쩐지 항공사에서 온 직원이 나에게는 친절했으며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했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내가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겠느냐고 고소(苦笑)하였다.
싱가포르에서 뜻하지 않게 체류(滯留)하는 동안 덕택으로 많은 구경을 하였다. 택시를 빌려서 관광을 했는데 운전기사가 ‘말레이시아’사람이었다. 중국인들에 대한 비난이 대단했고 자기네들 신세타령도 심심치 않게 털어놓았다. 당시만 해도 비자 없이는 싱가포르에 입국하지 못했으며 나는 원래 비행장에서 두 시간만 있게 되었던 관계로 비자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불법입국자(不法入國者)가 되고 만 것인데 운전기사의 이야기로는 나와 같은 손님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회의에는 이틀이나 늦게 참석하게 되었다. 15개국에서 약 60명이 모여 있었다. ‘페라데니아’는 실론대학의 소재지이며 콜롬보에서 섬 중앙 쪽으로 상당히 들어가 있는 곳이었다. 대학 회의실을 사용했고 참가자는 기숙사에서 기거했다. 주위는 경관이 좋았고 영화 ‘콰이강의 다리’촬영지로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7일간 계속되는 회의였다. 나는 ‘컨트리 레포트’를 뒤늦게 읽었다. 회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내가 좌장(座長)으로 지명되었다.
어지간히 토론이 진행 중이었는데 인도대표 한 사람이 속사포와 같은 영어로 장광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는 좌장의 의견이 무엇이냐고 다그친다. 사실 나는 그의 질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문득 앞줄에 자리 잡고 있던 일본대표가 눈에 띄었다. 나는 좋은 질문을 해주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일본대표가 답변할 것이라며 지명했다. 깜짝 놀란 일본대표는 잘 모르겠다고 하며 얼굴을 붉힌다. 사정이 딱했던지 영국대표 한 사람이 점잖게 답변을 한다. 내 입장에서는 위기를 넘긴 셈이다.
그날 저녁, 술에 만취한 일본대표가 내방으로 찾아왔다. 그렇게 망신을 줄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 당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지명하였다고 했더니 진심이냐고 한다. 그렇다고 했더니 도대체 질문의 내용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 내 자신이 잘 파악하지 못하였던 처지였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고 이러이러한 내용이라고 했더니 그런 줄 알았으면 몇 마디 할 것을 그랬다고 후회한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이 대표와는 절친하게 되었다. 그 후 도쿄에서 또 서울에서 몇 차례 만났는데 수 년 전부터는 소식이 끊어졌다.
Ceylon에 있는 동안에는 많은 구경을 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후진국(後進國)에서 회의가 열리는 경우에는 정성껏 준비를 하며 관광을 잘 시켜준다.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하는 식물원, 코끼리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동물원, 유명한 실론티(茶)의 재배지나 공장, 불교의 나라답게 웅장한 사원 등을 관광했다.
Ceylon 총독은 고풍창연한 그의 관저에서 만찬을 베풀었는데, 특이한 장식들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나는 Ceylon회의를 계기로 하여 김교신(金敎臣) 선생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고, 다음과 같이 조금은 알게 되었다. 김교신(金敎臣) 선생은 도쿄고등사법학교(東京高師) 출신으로 지리학을 전공하셨다.
귀국 후 함흥 영생여고에서 교편을 잡으시다가 양정고보로 옮기셨다. 교사 생활을 하시면서 ‘성서조선(聖書朝鮮)’발행에 참여하셨다. 선생의 글이 불온하다고 하여 요 시찰 대상인물로 되셨다. 교편생활을 하시다가 민주주의를 봐야 한다는 목적으로 미국행을 결심하고 양정고보를 떠나셨다. 그러나 미국행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