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미도파 앞에서 우연히 이와무라(岩村 京畿中) 교장과 마주쳤다. 동경고사 선배인 교장이 반갑게 근황(近況)을 물었다. 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기중으로 오시도록 알선했다고 한다. 이것이 김교신(金敎臣) 선생께서 우리들과 인연을 맺게 된 동기이다. 그러나 지리학(地理學)은 저학년이 대상이었던 관계로 나에게는 선생의 강의를 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
반년 정도 경기중(京畿中)에 계신 후 선생은 송도(松都)고보로 자리를 옮기셨다. 여기서는 양정고보시절의 제자였던 유달영(柳達永) 선생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선생은 유(柳)선생이 고보시절 5년 동안 계속 담임을 맡으셨던 관계로 두 분 사이는 각별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성서조선(聖書朝鮮)’일을 계속하셨고 주필로 활약하시기도 하였다. 이 일이 옥고를 치르시게 된 직접 동기가 되었다. 선생은 그 후 흥남(興南)에 있던 질소공장으로 가셨다. 한국 젊은이들이 징용되어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께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계몽운동(啓蒙運動)을 전개하셨다. 해방되기 3개월 전에 발진티프스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상에서 약술했지만 선생은 범인(凡人)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들을 몸소 하셨다. 그 중에서도 소록도를 찾아 나환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하신 것은 특이하다고 하겠다. 후에 소록도병원장을 지내신 신정식(申汀植) 박사는 ‘김교신(金敎臣)과 문둥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이 사정을 잘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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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교신 [출처 : 김교신 선생 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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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동경 유학시절에 뜻을 같이 하셨던 분들과 함께 많은 일을 하셨는데 함석헌(咸錫憲) 선생도 그 중의 한 분이다. 경기중(京畿中)에는 반년 남짓 계셨는데 이 짧은 기간 중에 학생들에게 많은 감화(感化)를 주시기도 하셨다. 현재 인하대 병원에서 근무하고 계신 안과학의 권위 구본술(具本術) 교수도 애제자의 한 사람이다.
나는 내 자신이 종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종교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라고 믿는다. 나는 훌륭한 종교인에 대하여는 언제고 경의를 표한다.
② Krannendonk 교수의 충언(忠言)
1966년 4월 초에 스톡홀름으로 가는 길에 암스테르담에 들렀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교대로 개최하는 ‘지역사회개발을 위한 국제과정(International Course of Community Development)’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6개월 과정에는 66년에는 노병호(魯炳鎬) 교수, 임한종(林漢鐘) 교수 등이 참석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열대연구소에서 열리고 있었으며 15여 개국에서 와있었다. 나는 정식 참가자가 아니고 단순한 방문객이었다.
이 과정의 책임자인 크란넨돈크(Krannendonk) 교수와 인사를 하였더니 자기 교수실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다. 그다지 넓은 방은 아니었지만 잘 정돈되어 있었고 사방의 탁자 위에는 많은 골동품(骨董品)이 놓여 있었다. 장 속에서 위스키병을 가져오더니 한잔 권한다. 나는 원래 낮술을 잘 못한다.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붉게 된다.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지간히 취기가 돌았다. 크란넨돈크 교수는 점심시간이 가까우니 마음 놓고 마시라며 자꾸 권한다.
화제(話題)가 일제 시로 돌아갔다. 일제에 36년간 짓밟히다 보니 형편없이 되었다고 넋두리를 했다. 경청하던 크란넨돈크 교수가 말한다. 다 같이 학교에서 지내는 입장이기 때문에 혹시 결례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마음 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구라파의 어느 나라이고 식민지를 가져보지 못한 나라는 없으며, 탁자 위에 있는 저 물건들도 전부 식민지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다는 논법이다. 구라파에서는 식민지를 가져보지 못한 나라가 없으니 말조심하라는 뜻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스톡홀름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한 가지 이야깃거리를 주겠다고 한다.
해적(海賊)질을 했건 약탈을 했건 나라를 살찌게 만든 조상들에 대한 흠모가 어떤 의미에서는 유럽 사람들 속에서 흐르고 있는 공통된 의식인지도 모른다. 비단 유럽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이와 같은 의식을 관찰할 수 있다. 넓게는 나라의 차원에서 좁게는 가문의 차원에서 위인이나 영웅을 기리고 조상을 미화하는 사례가 수없이 많다.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③ 어느 미국교수의 이야기
국제회의에 참석하거나 시찰여행을 할 때 일어나는 해프닝은 누구나 경험하는 바이다. 이러한 해프닝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바이다.
어느 국제학술회의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미국의 모 교수 이야기다. 나와는 교분이 두터운 처지여서 서슴지 않고 의견을 털어 놓는다. 한국 사람들 중에는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비롯하여 역대 대통령들을 헐뜯는 인사도 상당히 있는데 이해하기 힘들다는 내용이다. 사람이란 으레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니고 있는 법인데 마치 단점밖에는 없는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이 전부 못 쓸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한국이 오늘날과 같이 발전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는 왜 그런지 남의 장점(長點)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아량과 여유가 부족한 것 같다. 일제의 잔재인지도 모른다.
학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우연히 옆 좌석에 자리했던 어느 외국인이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중국계 미국인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이 낯선 사람은 붙임성이 있어 보였다. 무역업무차로 다섯 번째로 서울에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하면서 한국의 장래는 밝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부터 앞세운다. 그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서슴지 않고 답변한다. 첫째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없다. 둘째는 점심 값이 너무 비싸다. 점심 값은 5불이나 6불이면 충분한 것인데 서울에서는 20불에서 80불까지 하니 너무하지 않느냐. 셋째는 자기는 한국에서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니 한국에 도움을 주는 사람인데 조금이라도 잘 모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면 금세 자기를 속이려 든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모두가 수긍이 간다. 나는 ‘얼굴에는 미소를’, ‘가슴에는 사랑을’, ‘머리에는 지혜를’, ‘손에는 일을’ 이라는 구호를 특히 젊은 층에게 외칠 때가 많은데 이 외국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새삼스럽게 우리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 통계인가 인생 80년 동안 서양 사람들은 웃는 기간이 8년인데 비하여 우리 경우는 그 10분의 1이라는 것이 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분명히 우리들에게는 웃으며 지내는 시간이 짧다.
점심값은 물론이고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음식 값은 지나치게 비싼 것도 사실이다. GNP에 비해 음식 값이 턱없이 비싸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이나 불평은 내국인이나 외국인이나 공통되어 있다.
상대를 속인다는 것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직(正直)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물으니 일본 가정교육의 중심은 첫째 약속을 지키는 일, 둘째는 정직, 셋째는 절약과 검소라고 예외 없이 답해주었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이 세 가지가 생활화(生活化)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