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을 하려면 사물(事物)이나 사태(事態)에 관한 완전한 파악과 충분한 지식이 전제가 된다. 행정을 하는데도 언제나 예측이 요구되고 연구를 하는데도 기대효과가 도출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아무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큰 규모의 일이든 작은 규모의 일이든 앞서 지적한 전제는 언제나 필수적(必須的)이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지만 특히 학자의 경우에는 과거와 현재를 완전히 파악해야 앞을 내다볼 수 있다. 1980년대 말 소련을 비롯한 동구공산권에 밀어닥친 민주화(民主化)물결을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속도에 있어서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것이 있었다.
나의 주변에는 많은 정치학자와 정치가가 있지만 이런 사태가 생길 것이라는 예언(豫言)을 한 사람은 없었다. 어렴풋이 느끼게 된 인사들은 있었겠지만 나에게 직접 이야기해 준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버드대학의 명예교수인 Daniel Bell 박사는 특이한 존재다. 사회학자인 그는 미래학(未來學)의 석학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90년 7월 8일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초청으로 내한하고 9일 힐튼호텔 컨벤션홀에서 ‘제3의 기술혁명’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강연시작 전에 몇몇 분과 함께 대기실에서 벨 박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박식(博識)하고 중후(重厚)한 학자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는 1960년에 ‘이데올로기의 종언(終焉)’이라는 명저를 내고 소련 및 동구 공산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방의 물결을 훨씬 전에 내다보았다. 그 후 1973년에는 ‘후기 산업사회(後期 産業社會)의 도래(到來)’를 출간하여 미래정보사회를 예견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가장 뛰어난 미래학자요, 학자예언자임에 틀림없다.
‘제3의 기술혁명’이라고 제(題)한 그의 강연은 흥미진진하였다. 제1의 혁명은 약 2백 년 전에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蒸氣)기관을 통해 이루어졌다. 증기를 이용하여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여러 가지 작업을 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증기를 이용하여 어떤 동물보다도 빠르게 되었고 오래 달리는 기차를 발명하였고, 바람을 이용한 범선(帆船)보다 빠르고 견실한 증기선을 만들었으며, 방직기를 발명하여 숙련된 여공이 짜는 것보다 훨씬 빨리 직물을 생산해냈다.
제2의 기술혁명은 1백여 년 전에 있었던 전기(電氣)와 화학(化學)의 혁신이다. 전기는 증기로는 불가능한 수백 마일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하고 증기열(蒸氣熱)의 손실 때문에 한 공장안에 집중시켰던 기계를 분산시켰다. 또 전기(電氣)는 새로운 종류의 광원으로 낮과 밤의 생활리듬을 변화시켰으며 정보를 전신화(錢神化)하고 소리를 전기 신호화(信號化)함으로써 전화와 라디오를 탄생시켰다.
화학은 염색에서 플라스틱, 섬유, 비닐에 이르기까지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는 인공합성을 만들어냈다.
지금은 제3의 혁명기이다. 제3의 혁명의 바탕을 이루는 네 가지 기술혁신ㄴ은 시스템의 전자화, 소형화, 디지털화 및 소프트웨어이다. 이러한 신기술은 ‘하이테크’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치며 과거의 모든 사회관계를 재조직하는 총체적인 변동을 암시한다.
다음 세대에 우리는 컴퓨터에 파묻히게 될 것이다. 그것도 대형컴퓨터가 아니라 하나의 칩으로 된 마이크로컴퓨터가 우리의 가정과 사무실 및 공장에 자리 잡고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보고 있다. 통신수단을 전화(음성), 텔레비전(화상), 컴퓨터(데이터), 팩시밀리(문서)로 구분하는 것은 사라지고 있으며 디지털방식으로 상호연결 되어 단일 체제로 통합(ISDN)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컴퓨니케이션(compunication)또는 텔레마틱(telematique)이라고 부른다.
세계는 세 가지 사회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전기 산업사회는 농업, 광업, 어업, 임업과 같은 1차 산업을 위주로 구성되는 사회를 말한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이 이에 속하며 이런 지역에는 노동력의 60%이상이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자연과의 게임(Game Against Nature)’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날씨의 변덕, 토양의 소모, 산림의 황폐 등에 크게 좌우되는 까닭이라고 설명한다.
산업사회는 상품의 대량생산을 위해 기계에 동력을 투여하는 형태이다. 여기에는 대서양 주변의 서유럽, 미국, 소련, 일본, 한국 등이 포함된다. 그는 이를 ‘제조된 자연과의 게임(Game Against Fabricated Nature)’이라고 하며 여기에서는 기계에 대한 인간의 속박, 규칙적인 작업과정 등이 두드러진다.
후기 산업사회는 ‘인간끼리의 게임(Game between Persons)’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지식과 기술에 대한 새로운 원리가 존재한다. 한편 후기 산업사회는 서비스사회로 특징지어진다. 전기 산업사회는 가내서비스가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산업사회는 공공사업, 창고업, 수리업, 운송업 등에 따르는 부수적인 활동으로 서비스가 존재해왔다.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새로운 종류의 서비스가 생겨난다. 새로운 서비스로는 교육, 보건, 사회사업, 사회복지 등과 같이 인간과 직접 관련되는 것들과 분석, 기획, 설계, 프로그래밍과 같은 전문적인 것들이 있다. 일찍이 아담 스미스는 서비스가 비생산적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전기산업사회에서의 사고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전문직, 기술직, 관리직에 종사하고 있고 17%정도가 공장노동을 하고 있는데 10년 이내에 공장노동근로자는 10% 이내로 줄어들 것이다. 1900년 당시 미국에서 농민의 비율은 50%였지만 지금은 4%에도 미치지 못하는 농민들이 미국에서 남아돌 정도의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
흔히 새로운 사회의 견인력(牽引力)을 담당하는 신기술의 개발이 고용감소를 초래한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기술은 노동을 대체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기술은 노동을 대체 한다기 보다는 자본절약을 가능케 해주고 새로운 노동인력을 창출해낸다. 20년 전 미국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는 직종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20만 명에 달하고 있으며 장차는 4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컴퓨터 없는 후기 산업사회는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제3의 기술혁명을 맞고 있다. 컴퓨터와 통신이 결합된 정보화사회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제4의 기술혁명이 도래한다면 그것은 생명공학분야가 될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치열한 지적기술경쟁(知的技術競爭)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사회를 예고하는 기술혁명의 근원이 기계가 아니라 지적기술인 때문이다. 과거의 국가역사는 영토 확장경쟁(領土 擴張競爭)이었지만 이제는 통신의 발달로 이는 의미가 없어진 셈이다. 국가경제의 측정도 생산자원보다는 지적기술에 의해 판가름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지적기술의 조직화가 국가 간 우열을 가리는 척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적기술의 제고방법이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데, 여기에는 첫째, 새로운 이론과 개념에 대한 연구개발투자를 늘리고 둘째, 기술과 과학의 결합을 적극 추진해나가며 셋째, 대학원이상의 고등교육제도를 발전시켜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후기 산업사회의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기술적 장치에 알맞은 새로운 사회구조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하는 것이 더욱 중유한 과제로 남는다.
나는 Bell 박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사회학자인 그가 어떻게 과학기술에 관하여 놀랄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느냐가 자못 궁금했는데 그와 친교가 있는 서정욱(徐廷旭) 박사는 유명한 물리학자 등으로부터 언제나 자문을 받고 공부하는 까닭이라고 알려주었다. Bell 박사가 방한했을 때 서(徐)박사는 한국전기통신회사의 부사장이었으며 이 모임을 관장했었다. 다음해 그는 과학기술처차관으로 전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