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골프 구력은 결코 짧지 않다. 골프채를 처음 만져본 것이 1955년 늦가을이었으니 말이다. 미네소타 보건대학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대학에 골프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불만 내면 골프채도 빌려주고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소식도 들었다.
골프장은 멀지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가보았다. 누군가 한사람이 ‘티업’하는 것을 보았다. 골프란 저렇게 치는 것이구나 하고 혼자서 생각해 보았다. 앞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나가자 나는 티구라운드에 섰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언제 왔는지 한 사람이 내 옆으로 다가온다. ‘핸디’가 얼마냐고 묻는다. 물론 ‘핸디’가 무엇인지 모를 때였다. 그런 것 나는 없다고 했더니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옆으로 몇 발자국 가더니 내가 하는 것을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앞사람이 했던 것같이 공을 놓고 휘둘렀다. 오른쪽으로 빗나갔다. 또 한 번 휘둘렀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가버렸다.
내가 치는 것을 응시하고 있던 학생이 묻는다. 언제부터 골프를 시작했느냐고 묻는다. 난생 처음 오늘 시작해 본 것이라고 했더니 깔깔 웃으면서 ‘노 핸디’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알 턱이 없지 않느냐고 대답했더니 후에 알게 될 것이라며 자기가 먼저 치고 나가겠다고 한다.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핸디’가 뭔지도 모르고 그런 것 없다고 했더니 이 학생은 내가 대단한 골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후에는 골프장에 가본 일이 없다. 68년에 골프연습을 시작하였다. 의대 구(舊) 생화학교실 건물 옆 공지에 연습장을 만들어 놓고 몇몇 동호인들이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는 소질도 없었지만 시간도 없었다. 몇 번 연습을 하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그때 함께 시작한 분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분은 후에 고려대(高麗大)로 자리를 옮긴 이호왕(李浩汪) 교수였다. 이(李)교수는 골프 실력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李)교수는 많은 업적을 남겨놓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유행성출혈열(流行性出血熱)에 관해서는 다른 학자의 추종을 불허한다. 즉 전 세계 처음으로 이 질병의 병원체를 발견하였고 더 나가서 백신까지도 제조하였다. 한마디로 국보적인 존재다.
물론 국내외 학회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평가를 받는다. 학자로서의 자질과 노력이 대단하지만 골프에 대해서도 이런 조건은 비슷하게 구비되어 있는 것 같다. 국제학회 때 외국학자와 골프를 통하여 친교를 맺고 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는 것이 이(李)교수의 변이다.
문교부장관 재직 시의 일이다. 84년 9월 23일 진의종(陳懿鐘) 국무총리가 태릉골프장에서 국무위원 친선골프대회를 마련하셨다. 나는 황영시(黃永時) 감사위원장, 신병현(申秉賢) 부총리와 한 조가 되어 첫 팀으로 나갔다. 황(黃)원장이나 신(申)부총리에 비하면 나의 골프는 골프라고 할 수도 없다. 특히 신(申)부총리의 골프는 관록이 있었다.
시합이 끝나고 만찬이 시작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로 꽃이 피었다. 시상순서가 되었다. 박찬경(朴贊競) 총무처장관이 발표한다. 준우승까지 발표되고 우승만이 남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오늘의 우승자는 권이혁(權彛赫) 문교부장관이라고 하지 않는가. 내 자신도 놀랐지만 황(黃)원장이나 신(申)부총리도 놀란 표정이었다. 시상을 하기 전에 프로가 설명한다. 권(權)장관의 핸디를 36으로 했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핸디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어쨌든 은제우승컵은 나에게 돌아왔다.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핸디를 조정했는가가 궁금했다. 문교부비서실에서는 ‘핸디’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조차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후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간혹 태릉컨트리 클럽에 나왔을 적의 스코어카드가 보관돼 있다는 것이다. 이들 카드에서 평균을 계산하다보니 36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은제 우승컵은 요사이도 서재에 진열되어 있다. 지금도 “36이 뭐요. 체통이 있는데 20까지는 내리도록 하세요”하던 이원경(李源京) 외무부장관의 농 섞인 조언이 생각난다.
|
|
| ▲ 23회 골프모임 / 남서울컨드리에서. 왼쪽부터 이서구, 김창수, 박응서, 윤승두, 김상홍, 나, 박승순, 장윤결, 이충선, 김영옥 제씨 (2001. 5.26.) |
|
환경처장관직에서 물러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즉 92년 6월 28일 태릉컨트리클럽으로 나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물러난 장관들을 위한 골프모임이었다. 2층 휴게실에 모여 있었다. 8시가 지나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자리를 함께 하셨다. 재임 시의 노고를 치하하시면서 당부의 말씀도 하셨다. 나에게는 환경과 보건분야에 대하여 계속 관심을 가질 것을 분부하셨다.
대통령휘장과 서명이 새겨져 있는 조그마한 은컵은 보여 주시더니 이 컵을 어떤 분에게 주어야 할지 기준을 정하자고 하신다. 나는 가장 성적이 나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올렸다. 경호실장은 트리플보기를 가장 많이 친 사람에게 주자고 한다. 대통령께서는 그것은 좀 심하고 더블보기를 많이 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시면서 나에게 의견을 물으셨다. 좋겠다고 답변올렸고 이 기준이 채택되었다.
나는 자신이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차례가 오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골프를 치지 않았던 까닭에 어떤 기준에 맞춘다는 것이 대단히 힘들 것으로 생각되었다.
3팀으로 편성되었다. 제1팀은 대통령, 최각규(崔珏圭) 부총리, 최호중(崔浩中) 부총리, 최병열(崔秉烈) 전 노동부장관(국회의원), 제2팀은 이해원(李海元( 전 서울시장, 이현우(李賢雨) 경호실장, 서동권(徐東權) 정치특별보좌관, 나, 제3팀은 최상엽(崔相燁) 법제처장, 정해창(丁海昌) 대통령비서실장, 안교덕(安敎德) 민정수석 비서관, 심대평(沈大平) 행정수석비서관으로 짜여졌다.
첫 홀에서는 더블보기를 했지만 그 후부터는 트리플보기의 연속이었다. 잘 안 맞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까지 안 맞으리라고는 예측하지 않았다. 아웃코스에서는 54를 쳤고 4개의 더블보기를 했다. 인코스로 들어가서도 사정은 같았다. 이제까지 골프를 친 중에서 가장 맞지 않은 날이었다. 스코어는 56이었고 더블보기는 5개였다. 모두 110개를 치고 더블보기는 9개였다.
오찬 중에도 대통령께서는 환경에 관하여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다. 김포매립장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셨다. 이윽고 시상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참가자들의 성적이 큰 글자로 붙었다. 100을 넘게 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110이고 보니 창피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상보다도 값진 상을 받았다. 더블보기를 제일 많이 친 사람에게 수여하는 은컵이다. 모두가 이 컵을 부러워했다. 가보가 하나 늘었다고 놀리면서 탐내기도 했다. 이 가보는 내 서재에 진열되고 있으며 친한 벗이 올 때에는 언제나 그때 일을 설명해 주곤 한다.
나는 소질도 없지만 골프에 대하여 진지하지 못했다. 그 결과 스코어는 100을 끊기가 힘들다. 꾸준한 노력도 없거니와 별로 애착도 없으니 골프를 잘 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또 하나의 슬픈 이야기가 있다. 골프라는 것은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 팀을 만들어 치는 데에 즐거움이 있는 것인데 나의 경우에는 이것마저 붕괴하고 말았다. 의대 동기인 박찬무(朴贊武)형, 윤경현(尹炅鉉)형, 1년 후배인 최원로(崔源老)형과 더불어 한조가 되어 그래도 골프를 즐겼는데 세 사람이 다 신체적으로 고장이 생긴 것이다.
네 사람이 한양(漢陽) 컨트리클럽의 회원이 되어 그래도 주말이 되면 골프를 즐겼는데, 재작년부터는 팀이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해체시기가 너무 빨리 왔다. 네 사람이 다 같이 인천(仁川) 국제컨트리클럽의 초기 회원이었다. 40만원씩 지불하고 회원이 되었는데 얼마 후에 39만원씩으로 매각하고 30만원을 더해서 한양멤버가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옛이야기 같지만 왜 그런지 한량없이 옛일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1993년 문민정부(文民政府)가 출범한 후 공직자나 사회지도층 인사에게는 골프를 자제하도록 되었다. 문민정부의 중점과제인 개혁의 일환으로 고통분담이 강조되었고 골프 자제도 이런 차원에서 해석되고 있다. 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골프를 자제하고 있다. 워낙에 잘 못치는 골프인데 발전은 더욱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골프를 시작할 무렵에 무던히 자극을 주었고 필드로 끌고나가서 용기를 주던 친구에 이성윤(李聖允) 박사가 있었다. 돈암동 로터리에서 소아과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골프광이었다. 나에게는 4년 후배였는데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학문적인 실력도 대단했고 남자다운 관록도 대단하였다. 문필가로서도 알려져 있었으며 수필가로서도 유명하다. 불행하게도 71년 9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분이 생존했더라면 나의 골프 실력도 상당히 발전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다. 77년 3월에 세계보건기구 후원으로 이란에서 보건대학원장회의가 열려서 나도 참석하였다. ‘테헤란’을 비롯해서 이란 내의 3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개최되었다. 많은 것을 보았고 배우는 것도 많았다. ‘테헤란’에서의 일이다. 일본공중위생원 원장(日本公衆衛生院 院長)이던 소메야(染谷) 박사가 일본대표였는데 이분과 함께 묵고 있던 호텔의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했다. 나보다도 5, 6년은 선배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나에게 접근하려고 상당히 노력하는 것 같았다.
골프가 화제로 등장했다. 골프에 대해서는 큰소리를 할 수 없는 나였지만 상대가 뭐 골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겠느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소메야(染谷) 박사는 근래에 ‘핸디’가 8로 올라가서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나는 ‘핸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인가 의심이 가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진짜 골퍼인 것을 알았다.
2차 세계대전 전에는 도쿄(東京)대학이 치바(千葉)에 골프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은 도쿄(東京)대학의학부를 졸업하고 미생물을 전공했는데 일본정부는 자기 같은 사람에게 병역을 면제해 주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다. 연구를 하면서 한쪽으로는 골프에 몰두하여 한때는 ‘핸디’가 3으로 내려가기도 했다고 자랑했다.
종전 후 일본 국회가 도쿄(東京)대학 같은 데서 골프장을 갖고 있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고 하여 몰수당했다는 설명이다. 그 후 대학골프장은 영영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미국대학에 골프장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전전(戰前) 일본의 대학에 골프장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부러운 이야기이기도 한데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