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총장 재임 시였던 1983년 8월에 처음으로 피지를 방문했다. 8월 7일부터 2주일간 피지를 비롯하여 파푸아뉴기니, 호주, 뉴질랜드 등 4개국을 여행하였는데 호주 외의 3국은 처음 가는 나라였다.
이 여행은 당시 우리나라 주재의 UNDP대표였던 ‘부니봄보(B. Vunibobo, bobo를 봄보라고 발음한다)’씨가 마련하였는데 이 분은 피지국의 교통부, 농림부차관, UN대사 등을 역임하고 우리나라에 부임한 인사였다. 피지에 남태평양대학(University of South Pacific)이 있는데 이 대학을 평가해달라는 부탁도 있고 하여 예비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했던 일이 생각난다. 의과대학의 김용일(金勇一) 교수와 총장비서실장이던 김인수(金仁洙)씨를 대동했다.
피지의 국제공항인 난디(Nandi)비행장에서 경비행기를 갈아타고 수도인 수바(Suva)로 갔다. 수바역에 도착하니 ‘부니봄보’씨가 몇 분과 함께 출영 나와 있었다. 함께 나온 인사 중에는 보건장관과 한국대사도 있었다. 한 곳을 들른 다음에 호텔로 간다고 설명해준다.
자동차로 약 4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부락에 도착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가 보니 상좌에는 여자가 있고 그 앞에 무희(舞姬)같이 단장을 한 약 50명의 부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 추장이라고 소개된 여자가 환영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고래치아(齒牙)라고 하면서 새끼 같은 노끈으로 꿰뚫은 것을 목에 걸어준다. ‘부니봄보’씨는 이것이 최고의 선물이라고 설명해 준다.
나는 감사하다는 답사를 하고 선물 대신 현금을 추장에게 주었다. 이런 행사가 있는 줄 알았으면 적절한 선물을 마련했겠는데 그렇지 못해 ‘부니봄보’씨와 상의하니 현금으로도 좋다고 해서 선물에 대신했던 것이다.
이윽고 춤이 벌어진다. 단조롭기는 했지만 성의를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더니 막걸리같이 보이는 것을 먹으라고 권한다. 용기는 조그마한 바가지 같은 것이었는데 도무지 마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소 주저하는 듯 했더니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도 다섯 잔을 마셨다는데 빨리 들라고 재촉한다. 여왕도 다섯 잔을 마셨다니 그 이하로 마실 수도 없고 해서 나도 다섯 잔을 마셨다. 은근히 취기가 돈다.
약 두 시간이 지났다. ‘부니봄보’씨에게 호텔로 갈 시간이 아니냐고 했더니 추장에게 가서 상의한다. 해방되었다. ‘부니봄보’씨와 보건장관은 여추장이 이해를 해줘서 다행이라고 하며 5, 6시간을 함께 지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해 준다. 이렇게 해서 ‘피지’여행은 처음부터 인상적이었다.
‘수바’에 있는 동안 두 차례 연설을 했다. 하나는 남태평양대학에서, 다른 하나는 피지의과대학병원에서 있었다. 8월 18일, 남태평양에서 행한 특별강연의 제목은 “General Status of Public Health Services and National Family Planning Programme in Korea"였는데 백여 명의 교수와 연구원이 참석하였다.
강연은 질의응답으로 이어졌는데 교수들, 특히 인구학 전공 인사들이 비상한 관심을 보였으며 학술교류에 대해서도 요망하는 바가 컸었다. 남태평양대학은 남태평양의 수개 국이 합자하여 만든 대학인데 결국 ‘피지’만 덕을 본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다음날 피지의과대학병원에서 있었던 강연회에는 약 150명의 교수와 직원들이 참석했다. 피지의과대학은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Medical Education in Korea ; Role of the National Teacher Training Center for Health Personnel on Educational Renovation"이 연제였으며 의학교육연수원에서 얻은 경험을 중심으로 하였다. 강연 끝머리에서 의학교수연구원의 경험을 “Feasible Innovation for Justifiable Implementation(정당화 이행을 위한 실현 가능한 혁신)"이라고 하고 약(略)해서 FIJI라고 하여 큰 박수와 갈채를 받았던 일이 회상된다.
전날과 같이 질의응답으로 이어졌으며 많은 질문이 나왔다. 그 중의 하나는 새마을운동의 이론과 실제에 관하여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알고 있는 대로 답변하였다. 어떻게 새마을운동을 알게 되었는가 되물었더니 서울에서 있었던 새마을 운동 연수과정에 참석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피지’에도 이 운동이 도입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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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학교 총장 시절 깁상협 국무총리 서리의 예방을 받고 환담을 나누고 있다 [ 출처 ; e영상기록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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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이 다른 나라에서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마을운동 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서 이 운동이 건전하게 전개되어 옛 영광을 찾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피지’에서의 강연은 김용일(金勇一) 교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원고작성에서도 그랬지만 강연 때도 ‘프로젝터’조작을 김(金)교수가 직접 맡아주었다. 한때 우리나라의 주재 미국 AID처장이었던 ‘포피(William E. Paupe)’씨도 만났다. 나와는 교분이 두터웠고 부인은 월남여인이며 우리가족들과도 왕래가 있었다.
댁으로 초대해 주어 오래간만에 이분 가족들과 하루 저녁을 즐겼다. ‘포피’씨는 당시 주 ‘피지’국 AID책임자로 있었는데 관계(官界)를 떠난 후에는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
‘수바’에서 국제공항으로 가는 코스는 ‘부니봄보’씨의 배려로 자동차 편이 되었다. ‘피지’를 동서로 횡단하는 까닭에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도중에 박물관에도 들렀다. 백 년 전 까지만 해도 식인종이었다고 하는 피지인들은 박물관에도 해골을 전시하여 옛날 자랑거리를 보여주고 있다.
Pacific Ocean호텔에도 들렀다. 여기서는 지배인인 남성과 섭외담당이라는 여성으로부터 점심대접을 받았다. 호텔 건너편에는 Pacific Harbor 골프장이 있는데 피지에서는 으뜸가는 명문이라고 자랑한다.
점심을 들면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에 관하여는 별로 아는 것이 없고 김철호(金澈鎬)씨, 문선명(文宣明)씨, 미국에서 시합 후 사망한 권투선수 김덕구(金德九)씨를 거론한다. 세 사람이 다 나와는 인연이 없는 분들이어서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다. 김씨에 대하여는 관광사업(觀光事業) 때문에 이곳을 방문하게 되어 있었는데 약속한 시기에 오지 않는다고 불평조로 하던 말이 기억난다.
두 번째 ‘피지’방문은 녹십자회장으로 재임 중인 89년 3월 31일부터 4월 7일까지였다. 세계보건기구가 주최한 간염(肝炎)백신회의에 참석하게 위해서였다.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인 한상태(韓相泰) 박사가 주도한 회의였는데 하루는 ‘피지’수상이 한(韓)박사와 나를 ‘퍼시픽 버’골프장으로 초대했다. ‘마라(Ratu Sin Kamisese Mara)’ 수상은 대단한 골퍼였다. 경기 후 골프장 옆에 있는 별장에 마련된 점심에 초대되었다. 별장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거처하며 출근한다고 했다.
식사 중에는 젊은 사람이 시중을 들었는데 자기 아들이라고 한다. 집안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수상은 원래 피지의과대학을 졸업했는데 보다 큰일을 하기 위해 옥스퍼드대학에 가서 법학을 공부했고 다시 런던 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고 말해준다. ‘피지’국민들의 요망에 따라서 이렇게 공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중들던 아드님 역시 옥스퍼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피지외무부서 국장직을 맡고 있다고 한다. 따님이 한 분이 있는데 케임브리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들려준다.
수상(首相)가족의 학력을 듣고 놀라운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학력의 소유자가 아닐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세계적인 고학력자(高學歷者)이고 보니 놀랄 수밖에 없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이런 점을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고 재삼 자신에게 다짐하게 된다. 언제고 남을 낮게 봐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모방하기 어려운 장점이 있는 법이라고 믿어야 한다.
‘피지’수상과 나는 두 번째 대면이다. 첫 번째는 1988년 2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했을 때였다. 당시는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 선거운동 기간이었기 때문에 남태평양 여러 나라에 대하여 영향력이 컸던 ‘피지’수상을 잘 설득할 필요가 있어서 주 ‘피지’한국대사와 함께 한 일이 있었다.
‘수바’를 떠나기 전날에는 ‘부니봄보’씨 댁에 초대되었다. 이 분은 한국에서 돌아온 후 ‘피지’내각의 무역, 상공부장관으로 임명되어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주‘피지’한국대사와 보건장관도 함께 초대되어 옛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가 선물로 준 목제 바가지는 지금도 서재에 장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