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정리(溫井里)를 거쳐서 내금강(內金剛)으로 갔다. 만물상(萬物相)을 비롯한 여러 봉우리, 계곡, 폭포 등 그야말로 말이나 글로는 형용할 수 없는 황홀한 선경(仙境)에 대하고 보니 그저 마음이 숙연해질 뿐이었다. 떠들썩하게 좋아하던 우리 두 사람이 벙어리가 된 것도 사실이다.
둘이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암자에 들렀다. 그저 잠시 쉬고 갈 생각이었는데 초로(初老)의 신사 한 분을 만났다. 평화스러운 인상이었는데, 우리들이 예과생이나 고교생인 것을 금세 알아보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교양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가끔 입산해서 마음을 닦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분인지는 묻지 않았다. 노신사는 젊었을 때 마음을 닦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거듭 당부했다. 그래도 헤어질 무렵에 자기 이름이 김사민(金思民)이라는 것은 밝혀 주었다. 아마도 동포들을 생각한다는 뜻인지 모른다. 이분이 그 후 어찌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 아름답고 황홀한 선경(仙境)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금 이 선경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전쟁(戰爭) 중이어서 예과교육 기간이 3년에서 2년 반으로 단축되었던 관계로 1943년 9월에 의학부로 진학했다. 4월 대신 9월에 개학한 것이다. 나는 예과시절과 마찬가지로 학부에서도 총대(總代)직을 맡았다.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데 일본인 학생 1명과 함께 두 명이 총대가 되었다. 일본인 총대로는 니시오카[西岡]라는 학생이 선출되었는데 질이 좋지 않았다. 대체로 일본 본토에서 온 학생은 양질인 편이고 한국에서 자라난 일본인 학생은 질이 좋지 않았는데, 니시오카[西岡]는 본토의 광도(廣島) 출신이었지만 질이 좋지 않아서 나와는 사사건건 시비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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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과생 시절, 함춘원에서 / 1943년 5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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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에 진학하자마자 제일 골탕을 먹게 되는 과목이 해부학(解剖學)이다. 당시에는 교육과정 중 해부학의 비중이 대단히 컸었다. 일제시의 대학은 강좌제(講座制)로 운영되었는데 해부학은 3강좌로 기초의학에서는 제일 규모가 컸다. 보통 2강좌를 두었는데 위생학은 1강좌였다. 해부학과정 중에는 별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부학 교수가 막강했던 관계로 누구도 불평을 못하는 것이 그 당시의 실정이었다. 1학년 초에는 뼈[骨]에 관한 학습이 중요부분을 차지하였는데 우선 뼈의 이름을 외우는데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어수룩하였던 일본인 조수(助手)에게 간청해서 뼈를 집으로 가지고 가서 공부하던 일이 생각난다.
겨울철이 가까워지면서 시체 해부실습이 중요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의학부 학생이라는 실감이 들었던 것 같다. 실습용 시체는 사망 시의 자세를 그대로 보이고 있어서 그 모습이 가지각색이었다. 일반적으로 정상적 환경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행려병자(行旅病者)나 사형수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 모습들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막상 시체를 대하게 되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들도 한때는 우리들과 같이 뛰고 놀고 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에 자연히 시체의 존엄성(尊嚴性)을 인식하게 된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시체는 실습대에 오르기 전에 얼마동안 포르말린 탱크에 저장된다. 이 탱크를 관장하였던 곰보아저씨가 거룩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이 아저씨는 시체를 저장하고 실습실(實習室)로 옮기며 실습 후에 처리하는 것이 직업이다. 정신없이 실습에 열중하다보면 혼자 실습실에 남게 되는 경우도 있다. 별안간 무서워진다. 특히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런 때 곰보아저씨가 다가오면 구세주(救世主)가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학창시절(學窓時節)에 가장 두통거리가 되었던 문제의 하나가 실습용 시체의 확보 문제였다. 시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의과대학이 이 문제 때문에 골탕을 먹었다. 어떤 대학에서는 시체장사를 한다는 루머까지 퍼지기도 하였다. 의과대학이 증설됨에 따라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엄밀하게 따지면 법적(法的)으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후에 나는 옛 생각을 하면서 해부학 시간을 줄이고 시체도 대용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구상해 보았다.
아무리 학장의 생각이라고 해도 이런 일들이 그대로 반영되기는 힘들었다. 대학만큼 자신의 권위(權威)를 찾고 변혁(變革)을 싫어하는 세상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궁리 끝에 호주에서 이름 있는 의학 교육학자를 모셔 와서 자문을 구했다. 이분도 호주에서 오랫동안 학장생활을 했던 분인데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경험담을 들려주고 '노하우'를 알려주기도 하였다.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기는 하였지만 어느 정도 이 과제는 해결되었다. 배외사상(拜外思想)이나 사대사상(事大思想)이 타파되어야 한다고 주장되기는 하지만 의외로 이들 사상은 우리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호주 교수와의 건의를 인용하면서 이 과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