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는 내과학의 이교희(李敎熙) 강사와 생리학의 이장원(李長源) 강사를 빼놓고는 한국인 교수가 전무하였다. 한국인 학생이 있었을 뿐인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대한협동당(大韓協働堂)사건에 관련되었던 학생들은 영웅심리에 불타있었지만, 그렇다고 차분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23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몇몇 학우들과 의학부 현관 앞 잔디밭에 누워서 한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구두 끝으로 머리를 건드린다. 누군가 하고 벌떡 일어나서 보니 야마가(山家 信次ㆍ야마가 신지)총장이다. 모두 일어났다. 단구의 야마가(山家)총장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훈시했다.
"자네들, 이 반도에 대학생이 몇 명 있는가, 적은 수의 대학생밖에 없는데 그런 자네들이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무던히 걱정스럽네. 독립은 쉬운 것이 아니야. 부지런히 활동을 해도 독립은 힘든 거야. 자네들 식으로 하다가는 또 먹히네. 나는 패망국(敗亡國)의 국민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운명은 알 수가 없네. 일본으로 돌아가도 살아남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 어느 모로 보거나 내가 자네들보다 먼저 죽겠지. 자네들보다 내가 늙었으니까. 나는 자네들을 보고 모르는 척하면 그만일세. 그러나 사제지간(師弟之間)이란 그렇지가 않네. 국적(國籍)은 다르지만 사제지간에는 국경이 없네. 제자인 자네들이 잘 되기만 바랄 뿐일세. 이것이 나의 유일한 소망일세. 반도가 자네들에게 기대하는 바는 정말로 큰 것이 아니겠는가."
야마가(山家)총장은 이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나는 야마가(山家)총장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요사이도 의과대학 현관 앞을 지날 때마다 그 때의 정경이 떠오른다. 야마가(山家)총장은 일본해군의 기술 중장(中將)출신이었다. 화학을 전공했으며, 이 분야에서는 잘 알려진 사람이다. 특히 화약(火藥)의 전문가라고 듣고 있었다. 경성제대(京城帝大) 이공학 부장을 거쳐 총장이 된 인사이다.
나는 의학부 학생회에 관계하게 되었으며 학급대표를 하다가 후에 학생회장(學生會長)직을 맡기도 하였다. 학생회장 시절에 나는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당시 우리 주변에서는 좌우충돌이 점차 격심해져 가고 있었으며, 스트라이크도 빈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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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대 의학과 2학년 때 / 문상호 형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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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도 이러한 물결은 흘러들어 왔다. 해방직후 교명은 제국(帝國)을 뗀 경성대학(京城大學)으로 불렸지만, 정식으로 개칭된 것은 10월 22일이었고, 10월 22일에는 역사적인 개학이 시작되었다. 해방직후 가장 시급한 현안 과제는 교수진의 구성이었다. 생리학의 고(故) 남기용(南基鏞) 교수와 약리학의 고(故) 서성중(徐聲重) 교수 등이 중심이 되고 학생회에서도 소주영(蘇柱永) 선배와 김경집(金慶集)선배 등이 관여하여 이 과제를 추진했던 것으로 회상된다.
해방 당시 남(南)선배와 서(徐)선배는 각기 생리학교실과 약리학교실에서 연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소(蘇)선배와 김(金)선배는 경성제대(京城帝大)의 최종 졸업장을 받았는데, 해방이 되자 이 졸업장을 찢어버린 것이 화제로 되었었다. 엄격하게 따지면 학생신분이 아니었는데도 학생회에 관여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남(南)선배는 그 후 생리학교실을 이끌어 오셨고 소(蘇)선배는 충남(忠南)의대, 경북(慶北)의대 학장을 역임한 후 대구에서 정신과 개업을 하였다가, 1992년 세상을 떠났다. 서(徐)선배와 김(金)선배에 관하여는 알려진 바가 없다.
초기의 교수진은, 해부학 교수에 나세진(羅世辰), 생리학 교수에 이갑수(李甲洙), 조교수에 남기용(南基鏞)·김봉한(金鳳漢), 생화학 교수에 이기영(李基寧), 병리학 제1강좌 교수에 이제구(李濟九), 강사에 박우균(朴雨均)·남창춘(南昌春), 제2강좌 교수에 윤일선(尹日善), 조교수에 정창수(鄭昌洙), 강사에 현인섭(玄寅燮), 약리학 교수에 이세규(李世珪)·오진섭(吳鎭燮), 미생물학 교수에 허규(許逵), 조교수에 박진영(朴鎭泳), 강사에 유준(柳駿)·라순영(羅順榮), 예방의학 교수에 최희영(崔曦盈), 제1내과 교수에 이정복(李正馥), 조교수에 김경식(金敬植), 강사에 이종두(李鐘斗), 제2내과 교수에 최응석(崔應錫), 조교수에 한심석(韓沁錫), 강사에 정언모(鄭彦模)·황주봉(黃朱鳳), 제3내과 교수에 이돈희(李敦熙), 조교수에 이윤응(李潤應), 강사에 김문진(金汶鎭)·박창호(朴昌鎬), 제1외과 교수에 문인주(文仁柱), 조교수에 한격부(韓格富), 강사에 서상면(徐相冕), 제2외과 교수에 김성진(金晟鎭)·김시창(金時昌), 조교수에 전성관(全成寬), 강사에 최완택(崔完澤), 정형외과 강사에 박병수(朴炳洙), 산부인과 교수에 김석환(金錫煥), 강사에 김자중(金子重)·이길호(李吉鎬)·신한수(申漢洙), 소아과 교수에 이병남(李炳南), 조교수에 이국주(李國柱), 강사에 최완석(崔完錫), 피부비뇨기과 교수에 최재위(崔在緯), 강사에 김응윤(金應允), 조교수에 공인호(孔寅浩), 이비인후과 교수에 한기택(韓基澤), 조교수에 우형직(禹炯稷), 강사에 이종진(李鍾軫), 정신싱경과 교수에 명주완(明柱完), 조교수에 임문빈(任文彬)·최재혁(崔在赫), 방사선과 교수에 이부현(李富鉉)·조중삼(趙重參), 강사에 김동창(金東昌) 선생 등이었으며 초대 의학부장에는 윤일선(尹日善) 선생, 초대병원장에는 명주완(明柱完) 선생이 취임하셨다.
경성대학(京城大學)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에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의학부 졸업생은 34명이었다. 동숭동 캠퍼스 대강당에서 나는 재학생 대표로 송사(送辭)를 읽었던 일이 생각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