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과 아버지 (제1회)
  제1장 나의 집안

안동 권 씨 집안의 시조이신 태사공 이후 20세손인 증호조참판 권진공이 김포에 정착하신 때가 1천 4백년대 후기였다고 짐작되니 지금으로부터 약 5백 년 전의 이야기다. 그의 아드님 常(상)은 1508년 9월 14일에 태어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는 길재(吉哉) 호는 남강(南岡)인데 당대의 석학이자 청렴검약의 사표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은 눌재 이충건(訥齋 李忠建)의 문하에서 장음 나식(長吟 羅湜)과 더불어 배우면서 도의를 공부하셨다. 21세 때에 진사가 된 후 문소은(文昭殷)의 참봉으로 처음 벼슬을 한 후, 돈영부 봉사(敦寧府 奉事), 직장이 되셨다. 한편 지극한 효심과 심오한 학문으로 당대를 풍미했으며 제전(祭奠)에 대한 정성이 대단하셨다. 이러한 관계로 선조 16년(1583년)에 선공감정에 추천되고 동 20년(1587년)에는 80세의 나이에 동지 중구부사(同知 中區府事)에 오르기도 하셨다. 1589년 7월 25일 82세로 별세하신 후 순충보조공신, 영의정, 동흥 부원군에 초증되셨다. 공으로부터 주동(鑄洞) 권씨라는 칭호가 생겼는데, 주동은 서울 남산 아래에 있었다.

또한 공은 ‘心中大德 經世彦人(마음속에 넓고 큰 인덕을 지니고 세상을 다스리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이라는 여덟자를 써서 자손의 항렬을 정해주셨는데, 이 여덟자가 우리 집안의 가훈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 집안의 항렬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컨대 나의 항렬자인 ‘이(彝)’자는 ‘경(經)’자로부터 온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보통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습자를 배웠는데 이(彝)자 쓰기가 힘들어 한번은 선친께 이 글자를 바꾸든지 없애든지 해달라고 진언했다가 심한 꾸지람을 받은 일이 생각난다.
 
서울대 교수출신이며 국회의원으로서 활약한  바 있고 현재는 독립기념관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최창규 박사와 우연한 기회에 만나서 이야기 하다가 이(彝)자가 화제에 올랐다. 우리 집안의 돌림자라고 했더니 최 박사는 대단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의 설명으로는 ‘떳떳 이’자가 유학의 기본이념을 나타내는 글자이며 이것을 돌림 자로 정하신 남강공(南岡公)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김포군 진성면 마조리 월명산에 공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백사 이항복이 신도비를 짓고 현감 이축이 글씨를 썼으며 지충추부사 노직이 전(篆)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성면은 원래 존재했던 진덕면과 봉성면의 일부를 합쳐 만들어진 지명이다. 김포군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보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공이 저술한 남강가첩은 유명하며 충북 청원군 옥산면 권희리에 소재한 백도서원에 공을 모시고 있다.

나는 태사공 후 34세 손이며 남강공의 13세 손이다. 선친께서는 1894년 6월 20일에 출생하셨으며 호는 소강이다. 한학과 신학문을 고루 갖추신 유학자였으며 서예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분이셨다.

선친의 거택 사랑방은 언제나 손님으로 들끓었다. 가세도 괜찮고 하여 선친께서는 다양한 취미활동도 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수렵은 대단하셨다. 때가 되면 엽총을 메고 나가셨는데 나도 여러 차례 수행하였다. 당시 애견으로 ‘포인터’종이 있었는데 무척 영리하였다. 나는 방학이 되면 마포에서 똑딱선을 타고 한강을 내려가 고향을 가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이 견공의 환영은 대단하였다. 상경할 때도 진성면 두류리 선착장까지 나와서 전송해주었다.

▲ 부모님(1979년) / 부친은 80년, 모친은 82년 각각 87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선친께서는 지역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셨다. 일제시대에는 민선 도평의원으로 활동하셨고 해방 후에는 한 때 민선 면장을 지내시기도 하셨다. 김포군 문화재보호 노인회장을 맡으시는가 하면 경노대학 동창회장으로서 많은 활약을 하셨다. 한편으로는 육영사업에 대한 정열이 대단하셨으며, 기성회장으로서 고향에 중·고교를 설립하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

선친께서는 와이셔츠가 조금이라도 구겨지면 입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분이셨다. 사리에 밝으실 뿐만 아니라 남 돕기를 좋아햐셨다. 동네일에는 발 벗고 나서시곤 하셨다. 그런가하면 집안은 항상 깨끗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으며 손수 청소작업을 하시기도 하셨다. 김포와 서울을 오르락내리락 하셨는데, 얼마나 기민하신지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곤 했다. 아직 아침잠도 깨기 전 새벽같이 집으로 오셔서 당황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부지런한 분이셨다.  

1969년 3월 15일에 양친은 국일관에서 회혼례를 올렸다. 결혼 후 회갑을 맞이하는 것이니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결혼 당시의 모습이 재현되는 것이 특징인데, 이날 양친께서는 60년 전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여주시고 박수갈채를 받으셨다. 많은 햐객들이 찾아주셨는데 보사부장관이었던 김태동 선배께서 회혼의 뜻을 특유의 유모어 조로 설명해주시던 일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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