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학우의 수가 매년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936년 입학 때 수석으로 입학했던 백유진(白有鎭) 형은 벌써 전에 미국 유학 중 뇌막염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백상규(白象圭) 선생의 아드님이었던 유진(有鎭) 형은 귀족과 같은 풍모였던 것이 생각난다. 앞에서 적었지만 입학 초기에 가까이 지냈던 김한일(金漢日) 형, 박성화(朴性和) 형도 그립고, 나와는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김정근(金正根) 형이 그리워진다.
황인철(黃仁哲) 형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황(黃)형은 죽첨(竹添)보통학교에서 나의 1년 선배였다. 내가 5학년 때 일본의 황태자(지금 일본왕)가 탄생하여 일본 전국이 떠들썩했다. 서울에서는 보통학교 6학년 중 최우수학생을 학교당 1명씩 선발해서 동경(東京)으로 보내는 행사가 있었다. 당시의 경성(京城)일보사가 주관했던 것으로 회상되는데 타케조에 보통학교에서는 황(黃)형이 뽑혔다. 날씬한 곤색 제복을 새로 맞추어 입은 황(黃)형을 환송하기 위해서 전교생이 교정에 집합하였다. 교장선생이 안내하는 황(黃)형을 향해서 ‘황인철(黃仁哲) 만세’를 외치던 광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 당시 동경(東京)을 방문했던 각 학교대표들은 전원이 제 1고보에 입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호탕한 성격의 황(黃)형은 여러 가지 취미를 살리기 위해 한해를 쉬고 3학년 때 나와 한 학급이 되었다. 물론 우리들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서울법대를 졸업한 황(黃)형은 서울대학교 행정직원으로 발령되었다. 이 후 한 번도 서울대학교를 떠난 일이 없었고 총무과장으로서 오랫동안 터줏대감 노릇을 하였다. 내가 의대학장 시절에 한때 그가 서무과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만년에 그는 주말이면 혼자서 여행단에 끼여 각지를 다니는 것이 취미였다. 그를 오대산 국립공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안형규(安炯珪) 형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던 까닭에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된다. 서울대학교 치대(齒大)교수이던 안(安)형은 학장직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하자 곧 모 사립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강의 첫 시간에 교단에서 쓰러져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서예에 조예가 깊었으며 벽에 걸려있는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관세행정(關稅行政)에 밝고,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사기업체(私企業體)를 통하여 이 분야에서 활약하던 성기덕(成耆德) 형도 고인(故人)이 된지 오래다. 효자동(孝子洞)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던 생각이 떠오른다.
근래에는 전북(全北)땅에서 자기 이름만 대면 언제나 자기에게 안내된다면서 남자다움을 자랑하던 한무상(韓武相) 형도 가고 말았다.
방일영(方一榮) 형은 조선일보(朝鮮日報) 회장으로 활약하다가 1993년에 고문직으로 물러나면서 회장직을 계씨인 방우영(方又榮) 사장에게 물려주었다. 현재 조선일보 사장은 장남인 방상훈(方相勳)씨이다. 일선에서 물러나기는 하였지만, 언론계나 일반 사회에서 방(方)형이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나는 학술원 회장으로 취임한 후, 학술원을 홍보하는 방법의 하나로써 조선일보와 제휴하여 지상토론회를 1993년 한 해 동안 갖기도 했다.
다음은 방(方)형이 환갑을 맞이하여 발행한 기념문집 ‘태평로 1가(太平路 1街)’에 실린 나의 글이다. 당시 나는 문교부장관에 재직하고 있었다.
“남의 벗이 되는 그의 비결(秘訣)”
우초 방일영(愚礎 方一榮) 형과 필자가 교분(交分)을 맺게 된 계기가 옛 경성제일고보(京城第一高普 / 현 경기중학(京畿中學)) 입학이니 벌써 47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세월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 세대는 많은 변화를 겪어왔는데, 막상 갑년(甲年)을 맞이하니 감회무량이라는 표현이 실감난다.
우초(愚礎)를 말할 때는 계초 방응모(啓礎 方應謨)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가 앞서는 것이 상식이다. 중학교(中學校) 시절에 필자는 선생님 댁에서 멀지않은 서대문 평동(西大門 平洞)에서 살았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거의 빠짐없이 우초(愚礎)와 함께 계초(啓礎)선생님의 거실에 가서 인사를 올렸다. 둘이서 큰절을 하면 반드시 어진 말씀을 주시곤 하셨다. 점심때가 되기 때문에 점심을 얻어먹는 것도 목적의 하나였는데, 점심은 꼭 냉면 한 그릇이었다. 그 냉면의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요사이도 가끔 냉면을 먹을 때가 있지만 왜 그런지 그 당시의 냉면만큼 맛이 좋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계초(啓礎) 선생님께서는 우초(愚礎)에게는 자상하시면서도 엄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다운 가정교육을 실천하신 것이다. 뵈올 적마다 훌륭하신 말씀을 해 주셨는데 특히 강조하신 것이 성실(誠實)과 인내(忍耐)였다. 오늘날 성실과 인내는 필자의 좌우명(座右銘)이지만 여기에는 계초(啓礎) 선생님께서 주신 정신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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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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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초(愚礎)에 관한 에피소드는 한없이 많다. 제일고보(第一高普) 입학 당시 우초(愚礎)는 지금과는 달리 비만증(肥滿症)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났었다. 필자는 원래 운동신경이 둔해서 오늘날까지 운동경기에서 한 번도 이겨본 일이 없는데 예외가 꼭 하나 있다. 아마도 1학년 때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검도(劍道) 시합이 있었다. 선수만이 참가하는 시합이 아니라 모든 학생이 참가하는 시합이다. 말하자면 필수과목인 것이다. 대진표에 의하면 상대는 우초(愚礎)이다. 정좌(正坐)했다가 구령에 따라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우초(愚礎)는 기립동작(起立動作)이 늦었다. 이 틈을 타서 정면(正面)으로 후려쳤더니 단번에 승부가 끝났다. 이것이 이제까지 필자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꼭 한번 시합에서 이긴 경험이다. 그 후 우초(愚礎)는 간간이 대전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필자의 패배로 돌아갔다.
우초(愚礎)는 스케이팅 선수로서 이름이 있었다. 그의 스케이팅 폼은 높이 평가를 받았고 기록 면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올렸다. 선천적으로 우초(愚礎)의 운동신경은 대단히 발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무슨 종류의 스포츠든 그에게는 생소하지 않았다. 우초(愚礎)의 원만하고 거물(巨物)다운 인성(人性)이 계초(啓礎)선생님의 감화(感化)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에 스포츠맨쉽이 작용해서 더욱 아름답게 조화되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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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초(愚礎)와 우영(又榮) 사장 형제간의 정의(情誼)와 예의(禮儀)는 너무나 유명하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고는 하지만 불과 5세 차이고 두 분이 다 같이 내로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이 두 분의 정(情)과 예(禮)가 돋보인다. 우초(愚礎)를 모시는 우영(又榮) 사장의 자세에는 누구나 감탄한다. 계초(啓礎)선생님께서 훌륭하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흐뭇한 현실이다.
“상식(相識)이 만천하(滿天下)하되 지심(知心)은 능기인(能幾人)고”라는 옛말이 있다.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天下)에 가득하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세상에 진정한 우정(友情)으로 다져진 벗이 몇 사람이나 있는가는 삶을 영위(營爲)하는 인사(人士)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생각해 봐야 할 과제이다. 착한 사람도 누구에게나 착할 수는 없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에머슨은 벗을 얻는 비결(秘訣)의 하나는 나 스스로가 남의 벗이 되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필자는 이러한 격언(格言)들의 진의(眞意)를 우초(愚礎)에게서 찾는다. 고보(高普)시절 이래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분야가 다른 관계로 자주 만날 기회가 많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변함없는 우초(愚礎)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면서 심교(心交)의 정(情)을 자랑한다. 우초(愚礎)야말로 누구에게나 착하고 스스로 남의 벗이 될 줄 아는 인간 중의 인간이다.
방일영(方一榮)형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기원하면서 가연(壽宴)을 축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