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의 선생님의 수가 얼마였는지에 관해서는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40여 명이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인이 대부분이었고 한국인 선생이 예외적으로 계셨던 것은 분명하다. 입학했을 당시의 교장은 와다 히데마사[和田英正] 선생이었다. 대단히 점잖은 분이라고 생각되는데 직접 강의를 듣지는 않았던 관계로 점잖은 분이라는 것 외에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
3학년이던 1938년 10월에 와다(和田) 교장이 물러나고 이와무라 토시오[岩村俊雄] 교장이 취임하였다.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4학년 때 일본본토로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고베[神戶]에서부터는 기차 편으로 여행을 하였다. 어느 역에서인가 와다[和田] 전 교장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인자한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철모르는 우리들이었지만 이분을 대하고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사제지간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을 경험한 셈이다.
이와무라[岩村] 교장은 동경고등사범(東京高等師範) 출신이며 1914년에 우리나라 교육계에 발을 들여놓고 교장으로 부임하기 전에는 총독부의 시학관(視學官)으로 근무하였으며, 한국인을 일본인화 하는데 힘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기중학을 통하여 일본인화 하는 시범사업을 할 목적으로 교장에 부임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렇기는 하였지만 이와무라[岩村]교장은 대단한 정열을 가지고 학교를 이끌어 갔었다고 할 수 있다.
와다[和田] 교장이 온화한 분이라면, 이와무라[岩村] 교장은 모든 면에서 적극적인 분이었다. 스포츠를 비롯하여 다방면에 취미가 있는 분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우리들을 찾아와서 위로해주신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달밤에는 옥상에 집합하게 하여 격려의 말씀도 주셨고 소위 시음(詩吟)이란 것도 가르쳐 주셨다. 학교 일, 교육 일에 대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한 분임에 틀림없다.
1940년과 41년에는 일본에 출장하여 우수고등학교와 일류전문학교를 방문하고 경기중학을 알리고자 노력하셨다. 당시 한국인의 입학은 상당한 제한과 차별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상류 학교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농후하였다. 일개 식민지 중학교장이 설명한다고 해서 식민지정책이 바뀔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그의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한국 내에서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경기중 출신의 활로를 일본에서 넓혀보려는 뜻이었다고 풀이된다. 당시 일본의 구제 고등학교(舊制 高等學校)가 한국인 학생을 전연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와무라[岩村] 교장의 노력은 상당히 주효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한해에 10여명에 불과했던 것이 41년에는 20명을, 42년에는 30명을 넘겼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또 법과, 의과, 문과에 치중하지 말고 이공계로 진출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주장도 하였다. 그 결과 많은 학생들이 이공계로 눈을 돌리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는 건강(健康)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가졌던 분이며 훈화 시에는 언제나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지금도 이분이 하신 말씀이 회상될 때가 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가령 40분이 소요되는 거리라고 하면 20분 정도는 졸아도 좋다. 20분 동안 자기가 원하는 대로 졸 수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대단히 건강의 소유자라는 논법이다. 결코 상식적인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시간낭비를 피하고 피로를 회복시키는 데는 이러한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얼핏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생각해 볼수록 음미해 볼 만한 말씀이다.
졸업 때에는 졸업생 전원에게 휘호(揮毫)가 담긴 액자를 선물로 주셨다. 나에게 주신 글은 ‘매화감설(梅花堪雪)’ 이라는 구절이었는데 일일이 졸업생의 성명을 넣어서 쓰는 것이니 보통 일이 아니다. 일본인 교장으로서 이 분의 철학이 우리와는 다른 점이 있었겠지만 그의 정열과 노력은 높이 살만 하다.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이와무라[岩村]교장은 의리를 존중했던 인물(人物)인 것 같다.
김교신(金敎臣) 선생이라는 분이 교사로 취임하셨다. 당시에는 김교신(金敎臣) 선생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자전거로 등·하교하시는 선생의 모습을 뵈었을 뿐이다. 훨씬 후에야 종교계의 선각자이시며 요시찰인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상이 불온하다 하여 취직이 어려운 처지에 계셨는데, 이와무라[岩村]교장이 보증을 서서 경기중학(京畿中學)으로 모신 것으로 알고 있다. 김(金)선생은 이와무라[岩村]교장의 동경고사(東京高師) 후배였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와무라[岩村]교장이 의리의 인간이라는 단면을 말해주는 에피소드라고 하겠다.
한국인 은사 중에서 잊히지 않는 분 중에는 이주연(李周淵) 선생과 이관섭(李寬燮)선생이 계시다. 이주연(李周淵) 선생은 조선어를 담당하셨는데, 원래는 영어선생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 유학을 하신 분인데 접시닦이를 해서 장학금을 벌었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다. 당시에는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선각자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李)선생께서 무슨 이유로 영어 대신 조선어를 맡게 되셨는지는 분명치 않다. 와다[和田]교장이 바뀔 무렵에 이(李)선생도 그만두셨다. 이임하신 후에는 안국동(安國洞)네거리 근방에 조그마한 헌책가게를 차리셨는데 가끔 가뵙곤 하였다. 별로 재미를 보신 것 같지는 않다. 나의 이름의 돌림자인 ‘(이)彛’자를 제대로 읽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李)선생께서는 처음 시간에 호명하실 때 ‘떳떳 이’라고 하시면서 ‘어려운 이름을 가졌군, 일어서 보게’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 동기생들과 가장 인연이 깊었던 분으로는 이관섭(李寬燮) 선생을 들 수 있다. 제일고보 출신이어서 우리들에게는 대선배가 되는 분이다. 수학을 담당하셨고 학급담임도 맡으셨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음미해 볼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였다. 여러 가지 말씀 중에서도 정력을 함부로 낭비하지 말라는 타이름이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정력을 쓸 만할 때 쓸 만한 곳에서만 집중적으로 쓰라는 내용인데, 때로는 요사이 말로 성교육(性敎育)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다. 훤칠한 키의 이(李)선생은 줄곧 모교에서 근무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들이 2학년 때 고등관(高等官)이 되신 것으로 기억된다. 수업시간 중에 직접 말씀해 주신 것을 생각해보니 고등관으로 승진하신 것이 무척이나 반가우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많은 동문들이 이(李)선생을 찾아뵙곤 하였다. 해방 후에는 모교 교장이 되셨는데, 6·25동란 때 피랍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