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예과에 각종 운동부가 있었는데 한국인 학생은 대체로 농구부(籠球部)나 축구부(蹴球部)에 가입하는 것이 상례였다. 전통적으로 농구부나 축구부는 한국인 학생으로 구성되었고 누구나 둘 중의 하나에 가입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농구부에 가입했다. 운동소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뛰었다. 2년 반 동안 꾸준하게 농구부에서 뛰었지만, 정선수(正選手)로 선발된 일은 없었고 언제나 후보선수였다. 정선수가 되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인 학생 수가 적기 때문에 조금만 잘하면 최소한 학급 대표선수로 기용되었는데, 나는 이런 영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원래 대학 예과 재학기간은 3년이었는데 제 2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이 발발한 후 3년이 2년 반(半)으로 단축되었다. 어쨌든 2년 반(半)동안 뛰고도 후보 선수로 밖에 남을 수 없었던 불명예자가 나 이외에는 별로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원래 예과생의 운동 실력은 대단치 못하였으며 외부학교와의 대전(對戰)은 드물었는데 학급 대항전은 빈번하게 열렸다.
농구부원 중에는 앞서 적은 바와 같이, 소위 후보 선수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일반부’가 구성되었다. 1년 위인 서임수(徐壬壽) 선배가 이 그룹을 지도해 주었는데, 운동 뿐만 아니라, 많은 인생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새삼 고맙기만 하다. 앞서 적은 강(康)형은 일반부 선수, 즉 후보 선수가 아니고 정선수였는데, 가끔 우리 모임에 끼어들어 그의 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가 신입생환영 체육대회에서 주장한 대로 스포츠와 외국어가 예과생들에게는 필수적인 과제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스포츠나 어학(語學)에 있어서 개인의 소질이 상당히 반영된다는 사실도 숙지되어 있었다.
예과에 입학하던 해 12월 8일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일본인들은 소위 대동아 전쟁(大東亞 戰爭)이라고 하여 모든 것을 전시체제(戰時體制)로 바꾸었는데, 그 중에는 영어 대신 독일어교육에 중점을 두는 시책도 있었다. 당시 영어회화 강사로서는 영국인이 있었는데 이분은 추방되고 독일어회화를 맡았던 ‘후퍼’교수는 기세가 등등했다.
문과갑류 ‘법과(法科)’와 이과을류 ‘의과(醫科)’ 학생에게는 원래 영어와 더불어 독일어가 필수과목이었는데, 영어교육은 사라지고 독일어 교육은 더욱 위세를 부렸다. 적을 알아야 승리하는 것이니 더욱 영어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일인 영어교수가 일본 본토로 소환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식민지정책(植民地政策)이 더욱 악랄하게 되고, 오판(誤判)이 두드러지게 노정(露呈)되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이성(理性)을 잃은 처사가 고개를 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독일어 공부는 열심히 했다. 회화도 제법이라고 생각되었고 '파우스트', '루마니아 일기'등도 해독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어학이라는 것은 계속하는 데서 진가를 나타내는 것이지 중단되면 허사가 된다. 해방이 된 후에는 독일어 대신 다시 영어를 해야 했다. 1964년에 처음으로 독일을 방문했는데, 내 실력을 시험해보려는 뜻도 있고 해서 독일어를 사용해 봤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학이 중요하다는 데 대해서는 사족을 붙일 필요가 없다. 요사이는 영어 외에 또 하나의 외국어를 해야 한다고 후학(後學)들에게 외친다. 실제로 국제화(國際化)시대에 걸 맞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의 외국어 한 가지 정도는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제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학창시절에 꾸준히 노력하지 않고서는 영원히 풀기 어렵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외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배가 있었는가 하면 한국인에게는 우수한 학업성취(學業成就)만이 생존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라고 타일러 주는 선배도 있었다. 당시 예과에서는 학기말 성적이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는데, 상위 10위의 대부분을 한국인 학생이 독차지하였다. 즉, 10명 중 8, 9명은 한국인 학생이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선배들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받기도 했다. 내 자신은 이러한 면에서 한국학생의 체면을 상당히 살렸다고 자부하고 있다.
전쟁 때문에 날로 변해가던 시대이기는 했지만, 예과시절에 대해서는 지금도 향수를 느낀다. 교수진은 경제지리(經濟地理)를 담당하시던 육지수(陸芝修) 교수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교수 중에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학문적으로 훌륭했으며 학업성적을 평가하는 데는 공정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교련이나 체조 성적에 있어서는 멋대로 조절을 해서 한국인 학생에게는 불이익을 주는 예가 많았다.
예과시절에는 교수와 더불어 선배의 영향이 컸다. 어떤 교수는 방학 동안에 읽어야 할 책명을 나열해 주기도 했는데, 많은 선배들이 같은 식으로 지도해 주기도 했다. 선배가 동기생으로 되고 동기생이 후배로 되는 예도 적지 않게 있었다.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취미생활에 열중하거나 심리적으로 변화가 생기는 등이 주된 원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