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학교 시절이고 중학교 시절이고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중에 얼마간은 고향인 김포에 내려가서 지내는 것이 상례였다. 당시는 교통편이 빈약했다. 여름에는 마포에서 똑딱선을 타고 약 2시간 반쯤 한강을 내려가면 두류리라는 곳에서 하선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리 집까지는 약 3킬로미터 거리였다. 똑딱선은 강화까지 간다. 한강의 수심이 의외로 얕은데다가 만조, 간조를 이용해서 운항되는 까닭에 배가 강바닥에 걸려 선상에서 밤을 새우게 되는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이런 때에 배에서 마련해주는 밥맛은 그야말로 별미였다. 찬이 좋은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김치에 된장찌개였는데 왜 그렇게도 구미가 당겼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달밤에 식사를 하는 정취는 잊혀지지 않는다. 겨울에는 자동차 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언덕진 곳에서 목탄 버스를 밀던 생각도 난다. 자동차 편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하차 지점에서 집까지 10킬로미터 가까이 되는데, 추운 겨울 철에 이 길을 걷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일고보 2학년 때로 기억한다. 겨울방학 중이어서 버스를 타고 고향에 갔다. 한참 걸어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어떤 젊은 사람에게 굽실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는 일본인 순사도 끼어 있었다. 일제시대 인지라 일본인 순사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런데 이 일본인 순사까지도 굽실굽실 하는 것이 동심에는 기이하게 비쳤다. 도대체 저 젊은 사람이 무엇이 길래 저렇게 대우를 받는가 하는 의문과 호기심이 한꺼번에 생겼다. 알고 보니 군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군수에 대한 매력이 상당히 강해졌다. 이왕이면 나도 군수가 되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물론 혼자서 만의 결심이다.
군수가 되는 가장 가까운 길이 고등문관시험 합격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법학공보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4학년이 되면 장차 어느 분야로 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고 수업준비도 분야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문과와 이과로 대별되는 것이 상례이다. 군수가 되는 것이 꿈인지라 문과를 택했고, 이 분야에서 수험준비를 시작하였다. 선친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경성제대 예과의 입학시험을 몇 달 앞두고 있는 어느 날 큰 자형이 서울에 들렀다. 자형은 경성의전 출신인데 절업하자마자 오사카 상선의 선의(船醫)가 되어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선의를 그만 둔 후에는 여기저기 직장을 옮겼는데, 방랑벽이 상당히 심했던 까닭이라고 추측된다. 서울에 들렀을 당시에는 몽고에서 근무 중이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이 자형이 서울에 들른 다음 날 밤 선친께서 호출이 왔다. 가보니 자형과 두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군수가 되는 꿈은 버리라고 말씀 하신다. 자형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꿈이 상당히 허황된 것을 알게 되어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는 선친의 말씀이다. 자형의 말은 이렇다.
“그동안 여러 곳을 다녀봤고 여러 가지 경험도 많이 했는데 조섬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산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이 될 수는 없는 일이고 군수가 되기도 힘들지만, 되었다 해도 조선 사람이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니 기술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에게는 기술에 대한 소질이 없어 이 분야에는 자신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의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자형의 말씀이다. 의학에 대해서는 더더욱 소질이 없으며 환자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의학을 모르는 까닭이라고 한다. 의학에는 ‘임상의학’과 더불어 ‘기초의학’이 있는데 기초의학의 어느 분야는 환자 곁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제 아무리 기술에 대한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도 해낼 수 있는 분야가 의학 중에는 얼마든지 있다고 조언한다.
선친께서는 자형의 말씀대로 의학을 택하라고 강권하신다. 아버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드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선친과 자형의 말씀에 일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런 취미도 호기심도 없는 분야에 뛰어들어서 좋을 것이 있느냐고 자꾸 생각해본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봤다. 결국 약속 올린대로 의학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데 낙착되었다. 당시만 해도 어른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좋거나 싫거나 운명에 맡겨보자는 운명론자가 된 셈이다.
이렇게 해서 군수가 되려는 소년의 꿈은 사라졌다. 수험준비를 달리 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까지는 문과계의 준비를 해왔는데 이과계로 바꾸어야 한다. 몇 달 남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열심히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생긴 것은 아니다. 운명론자 비슷한 입장이 된 것이니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의학을 공부하려면 대학 예과의 이과을류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입학시험 문제지를 받아보니 할만하다. 학과시험 성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어쨌든 1차 시혐에 합격이 되어, 2차시험, 즉 구술시험에 응하게 되었다. 시험관이 멸사봉공을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라고 한다. 누에를 예로 들었다. 누에는 몸을 희생하고 인류에게 견사(絹絲)를 남겨주는 것이니, 멸사봉공의 상징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시험관이 대소한다. 대소하는 진의를 알 길이 없다. 얘가 신통치 않아서 크게 웃음거리가 된 것이 아니냐고 걱정해보기도 한다. 결국 합격하였다. 입학하고 나서 이 시험관이 ‘요코하마’라는 괴물 철학 교수라는 것을 알았다. 우연한 기회에 이 교수를 만났는데, 누에철학은 건재하느냐며 대소한다. 이렇게 해서 나의 길은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