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普通高等學校)에 입학하였다. 화동(花洞에 위치했던 목조건물이 지금도 그립기만하다. 방(枋)이 붙여지던 날, 고향의 먼 할아버지뻘 되시는 분이 일부러 상경하셔서 내 이름을 보고 경사 났다고 떠들썩하게 외치면서 춤추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당시 제일고보(第一高普)에서는 전국의 준재가 모여들었던 것이 사실이며 이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라고까지 말해졌다.
1938년 3학년이 되던 해에 제일고보(第一高普)에서 경기중학(京畿中學)으로 교명이 바뀌었다. 또한 새 건물도 이때에 준공되었다. 입학하던 해 8월에 착공하여 1년 8개월 만에 완공된 것이다. 어릴 때의 일인 까닭에 기억이 정확치 않으나, 새 교사(校舍)를 건립하는데 20만원이 들었다고 했다. 현재 서울시의회청사(市議會廳舍) 구 세종문화회관 별관(舊 世宗文化會館 別館)의 부민관(府民館)이었는데, 이 건물에도 같은 액수의 건축비가 든 것으로 알려졌었다. 화폐단위나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20만원으로 큰 건물이 세워졌다니 그야말로 꿈과 같은 옛 이야기다. 더욱이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이 일어났으며, 철근 시멘트 등의 자재값이 올라서 공사비용이 상승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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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중 2학년 때 안의선 형과 함께 (19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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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지었지만 새로 갖추어야 할 학생용 책상과 의자를 장만할 길이 막막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다행이도 학부형 중에서 도움을 주셔서 이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시던 방응모(方應謨) 선생과 실업계의 중진이시던 방의석(方義錫) 선생의 협조가 컸었다고 전문하고 있다.
또한 새 건물이 세워지기는 했지만 문제는 많았다. 우선 교실이나 복도의 바닥이 거칠었다. 우리들은 일과가 끝나면 ‘새끼’와 ‘겨’가 든 주머니를 가지고 매일 한 시간씩 마룻바닥을 닦았다. 군소리 없이 이 일을 해낸 것은 일종의 모교애의 발로가 아니었던가 한다.
드디어 1938년 4월 11일 신학기를 맞이하면서 이 우아한 백악의 배움터에 들어서게 되었다. 신축교사가 준공되던 해 가을에 대강당도 준공되었다. 개장식이 거행되었을 때의 정경이 회상된다. 조선일보 사장이시던 방응모(方應謨) 선생이 그랜드피아노를 한 대 선사하셨으며 개장식에서 방(方)선생이 소개되었다. 등단하신 까만 두루마기의 방(方)선생께서 우리말로 축사를 하셨다. 당시 학내에서는 우리말 사용이 금지되었었다. 모든 학생들이 경악하였다. 죽은 듯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선생의 말씀을 듣던 일이 지금도 눈앞에서 떠나질 않는다.
원래 4학년 때에는 만주(滿洲)로 수학여행을 가는 것이 관례였는데, 중일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었다. 그러다가 1939년에 부활되었는데, 이때는 대상지가 만주 대신 일본 본토였다. 13박 14일의 장기 여정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연락선으로 하관(下關)에 가서 구주(九州)의 별부(別付) 등을 구경하고 뢰호내해(瀨戶內海)를 거쳐 신호(神戶)에 도착하였고, 그 후로는 열차편으로 동경까지 갔다가 다시 열차편으로 하관(下關)에 돌아온 것으로 회상된다. 비교적 많은 곳을 구경하였는데, 이세신궁(伊勢神宮)과 같은 이름 있는 신사에도 갔었다.
동경(東京)에서도 여러 곳을 방문했는데, 특히 해군성에서 당시 해군대신이었던 요나이[米內]씨의 이야기를 들은 일, 조폐공사에서 제조과정을 관람하고 놀래던 일, 신문사를 방문해서 신문 제작과정을 구경하던 일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경도(京都)나 나량(奈良)의 정경도 생소하게 기억된다.
귀교 후에 여행기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는데 내가 쓴 것이 우수작으로 뽑혔다. 전체 학생들 앞에서 보고를 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강당을 꽉 메운 학생들 앞에서 다소 긴장되기는 하였지만 예기했던 이상으로 이야기가 잘 되었다. 그러나 끝머리에 가서 걸리고 말았다. 동경(東京)에서 자유 시간을 이용하여 몇몇이 국제극장(國際劇場)에서 쇼를 관람한 일이 있었다. 이 극장은 올림픽에 대비하여 개관한 대극장이었다. 무엇이 상영되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어쨌든 나에게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극장관람은 금지되었는데 그만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물론, 제지당했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일본 수학여행도 41년에는 8박 9일로 단축되었고, 그해 12월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 후부터는 끊기고 말았다.
중일전쟁이 진행되면서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점점 노골화되어 갔다. 1940년에는 전대미문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이 강요되었다. 거의 모든 성(姓)씨가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권(權)을 권등(權藤)이라 했고, 이름은 그대로 두었다. 네 글자가 다 힘들다고 간간히 구박을 받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