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동 백악의 건물이 현재는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으로 있으며 모교는 강남 봉은사(奉恩寺) 옆으로 이전하여 훨씬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경기고의 교훈이 ‘일(一).자유인(自由人)’, ‘이(二). 문화인(文化人)’, ‘삼(三) 평화인(平和人)’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중학시절의 일 몇 가지를 회상해 본다.
중학 시절에는 교칙준수(校則遵守)가 대단히 엄격했다. 제모나 제복 착용은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검열을 받았다. 한번은 4년 선배인 외사촌 형 이기웅(李起雄)씨로부터 넘겨받은 교복을 입고 등교했다가 보기 좋게 적발되기도 했다. 상의 앞면 단추와 단추 사이의 간격이 좁고 바지가 약간 나팔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랬던지 이런 패션이 부러워서 한번쯤은 착용해 봐야지 하는 심리가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러나 실현이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벨트도 일정한 것을 착용해야 하며 런닝이나 티셔츠도 그러했다. 학교가 제정한 규정에 맞지 않는 것은 착용이 허용되지 않았다. 체육복이나 신발도 그러했다. 안경을 착용하는 데도 담임선생의 허가가 필요했다. 안과의사에게 가서 검안결과를 받고 이것을 안경착용 신청서에 첨부하여 제출한다. 그렇다고 곧 허가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며칠이 지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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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現 정독 도서관은 화동 경성제일고보 백악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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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착용 허가가 나오기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광화문 네거리 정류장에서 안국동(安國洞)행 전차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다짜고짜로 따귀를 맞았다. 2년 선배였다.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근시 때문에 불편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는 한눈을 팔고 있었던 것 같다.
또 한 번은 안국동 근처를 지나던 버스 속에서 비슷한 일이 생겼다. 버스 속에는 경기여고(京畿女高)생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선배에게 무례하다고 하여 따귀를 맞았다. 조금은 억울했지만 말대꾸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당시의 세태였다. 별로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 대 맞은 것은 아무래도 여학생들 앞에서 존재를 과시하려던 심사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나의 뺨을 때린 사람은 다름 아닌 박찬무(朴贊武) 형이다. 나보다 1년 선배인 박(朴)형은 성대예과(成大豫科)에 입학 후 휴학을 하여 나와 동급생이 되어 나와는 형제보다도 가까운 관계를 지금까지도 맺고 있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 가가대소(呵呵大笑)하게 되는데,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보면 박(朴)형은 여러 사람에게 폭행을 일삼았던 것이 분명하다.
수업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었다. 나는 그런대로 잘 적응하였다. 수업에도 재미를 붙였고 예습이나 복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만, 교련(敎鍊)과 체육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다. 특히 체조(體操)시간에는 철봉을 비롯하여 많은 기구가 사용되었는데 나에게는 대단히 힘들었다. 교련이나 체조의 성적은 거의 클래스의 말미에 가까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검도(劍道)도 필수 과목으로 되어 있었는데 나에게는 부담이었다. 졸업 때 2급을 받았는데, 이것은 클래스의 가장 밑바닥 급수였다.
검도는 1943년 제 1고보시대에 이미 실시되었으나 당시에는 저 학년생에 대해서만 부과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38년부터는 전 학년에 대하여 부과되었고 1939년, 즉 2학년 때 체육관이 준공되자 그 이듬해 1월 8일부터 14일까지는 동계 특별훈련이 실시되었고, 이어서 1월 17일부터 2주일 간은 새벽에 등교하게 하여 소위 내한연습(耐寒練習)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 바람에 집이 먼 학생 중에는 학교 근처에서 하숙하고 있는 친구 방에 신세를 지는 기현상이 생기기도 하였다. 나는 열심히 하느라고는 했지만,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여러 차례 출전하여 시합도 해봤지만 단 한 번 승리한 기록이 있다. 그것도 상대가 비대해서 일어서는 동작이 더딘 틈을 타서 일격한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 뿐 자랑할 만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학과성적을 포함한 종합성적에 있어서는 우수했다. 언제나 상위권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중일전쟁(中日戰爭) 중이어서 여름방학 때는 근로동원(勤勞動員)이 있기도 했다. 김포(金浦)비행장 건설을 돕는 일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다. 삽으로 흙을 파고 옮기고 하는 것이니 알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5학년이 되던 해인 1940년에는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학내뿐만 아니라 전국이 떠들썩하였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극(極)에 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해에 경기중학은 개교 40주년을 맞이하였다. 기념식은 11월 1일에 거행되었는데, 전쟁 중이어서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이때 2기의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중학교육발상입지(中學校育發祥立地)’라는 비석과 ‘실질강건(實質剛健)’이라는 비석이었다. 전자에 대하여는 다소 물의도 있었으나 구한말 관립중학교령에 의하여 세워진 학교로서는 경기(京畿)가 처음이었기에 이 물의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