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용근(洪龍根) 형은 해방 후에 급우가 된 분 중의 하나이다. 일본 히로사키(弘前)고등학교와 토호쿠 제국대학(東北帝大)를 거쳐 나와 함께 된 홍(洪)형은 졸업 후에 군에 입대하여 대령으로 전역하기까지 군진의학(軍陣醫學)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행당동(杏堂洞)에서 덕선의원(德鮮醫院)을 경영하던 홍(洪)형은 진료보다 서예에 더 열성을 보였다.
89년 초부터는 병원을 내과전문의인 따님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2층 서재에서 서예활동에 전념하였다. 서예에 대한 그의 집념은 대단한 바 있었으며 그의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가끔 그의 서재에 가서 이야기를 듣고 작품도 보고 하였는데 실제로 그의 재능과 노력은 놀랄만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면 으레 작품을 보내주곤 하였다. 그는 서예가들의 모임인 갑자회(甲子會)의 회원으로서 이 분야에서 패자(覇者)가 되고 말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1990년 7월에는 고희(古稀)기념 전시회를 개최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고희(古稀)기념 전시회가 끝나면 전시(展示) 작품을 근인회원(槿仁會員)에게 한 폭씩 기증하기로 했으며 1989년 말 근인회 망년회에서는 그의 뜻을 고맙게 생각하고 최소한 액자 대금이라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의결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같은 모임에서 서울의대(醫大) 제 1회 졸업생 일동의 이름으로 축기(祝旗)와 조기(弔旗)를 만들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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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인회 35주년을 기념하여 (1982.) / 홍윤근 형은 고희기념전시회가 끝나고 서예작품을 근인회원에게 한폭씩 기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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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디어는 고 황산덕(黃山德) 선배의 빈소에서 얻은 것이다. 즉 조문 차 황 선배의 빈소에 갔더니 서울법대 제 16회 일동 명의의 조기가 있었다. 대단히 좋은 인상을 받았다. 연유를 알아보니 황 선배의 영식(令息)이 서울법대 출신인데 동기생이 조기를 만들어 상사(喪事) 때에 조화 대신 사용한다고 한다.
홍(洪)형에게 부탁하여 ‘경축(慶祝)’, ‘근조(謹弔)’, ‘서울의대(醫大) 제1회 졸업생일동(第1回 卒業生一同)’이라고 쓰게 하였고 한국공예사(韓國工藝社)에 제작을 맡겼다.
나는 90년 1월 11일부터 28일까지 WHO의 주선으로 노인문제 토의 차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게 되어 있었다. 출장 중에 기 제작이 완료될 것 같아서 녹십자(綠十字) 비서실에 당부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런데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로스앤젤레스’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는데 홍(洪)형이 1월 21일 작고했다는 전화를 비서실로부터 받았다. 홍(洪)형의 영전(靈前)에서 이 조기(弔旗)가 제일 먼저 사용된 것이다.
귀국 후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는 조기와 축기를 보니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1월 21일 일요일 아침에 인기척이 없어 침실에 가보니 이미 홍(洪)형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다. 아무런 병력(病歷)이나 징후가 없었는데 이렇게 졸지에 세상을 뜨게 된 것은 그의 흥분성 때문이 아니었겠느냐는 추측도 있다. 전날 즉 토요일 밤에 권투시합광경이 TV에 방영되었는데 혼자서 시청하다가 흥분한 나머지 쓰러진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추측도 있다.
녹십자(綠十字) 사무실이나 서울대 인구의학연구소(人口醫學硏究所)에 걸려 있는 그의 글을 볼 때마다 위대한 그의 필력(筆力)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그의 인생의 승리자라고 항상 이야기했었다. 학생시절에는 바둑의 왕자였고 장년기에는 탱고의 명댄서이기도 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탱고 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한 기록도 있다. 그 후에는 서예가로서 군림하였다.
홍(洪)형이 작고하기 전전해의 일로 기억된다. 예년과 같이 어느 가을날 갑자회(甲子會) 서예전시회가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 전시실에서 개최되었다. 나는 매년 참석하여 관람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그 날도 약속시간에 도착하였는데 홍(洪)형은 보이지 않고 대신 갑자회장이란 분이 영접해 주었다. 홍(洪)형은 사사(師事)하던 분이 돌아가셔서 문상 갔다고 하며 자신이 홍(洪)형을 대행한다는 것이다.
관람을 마치고 다방으로 가서 커피를 나누었다. 갑자회에 관한 이야기, 홍(洪)형에 관한 이야기 등을 주고받다가 서예에는 천부의 자질이 더 중요하냐, 노력이 중요하냐 하는 문제가 화제로 되었다. 나의 경험으로는 자질이 중요하다고 했더니 펄쩍 뛴다. 뭐니 뭐니 해도 노력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자질이 부족한 경우에는 성공하기가 힘들지 않겠느냐는 것이 나의 견해였는데 이 견해가 맹공을 받았다. 즉 자질은 1%를 밑도는 것이며 노력이 99%이상을 차지한다고 강조한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글을 보면 글 쓴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이완용(李完用)의 글에서는 썩은 냄새가 난다고 한다. 이완용(李完用)의 글이 명필에 속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 분의 말씀은 명필이 아니라 썩은 글이라는 것이다.
홍용근(洪龍根) 형의 글을 보면 그의 기개(氣槪)와 인격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고 칭찬한다. 이제 홍(洪)형이 갑자회 뿐만 아니라 우리 서예계를 이끌고 나갈 날이 가까워 졌다고 첨언하기도 했다.
홍(洪)형의 글로 된 축기(祝旗)와 조기(弔旗)는 지금도 나의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다. 축기(祝旗)는 사용빈도가 많을수록 좋다. 축화(祝花)보다는 훨씬 우아하고 뜻이 깊다. 이와는 반대로 조기(弔旗)가 사용될 때에는 언제나 서글프다. 또 한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참으로 야릇한 심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어찌 생각하면 자기가 쓴 조기(弔旗)를 자기가 제일 먼저 사용한 홍용근(洪龍根) 형이 가장 행복한 존재인지도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