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李洸鎬) 교수가 암으로 입원 중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곧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달려갔다. 핼쑥해진 모습의 이(李)교수는 미소 지으며 반색했다. 옆에 부인 김익순(金益順) 여사가 넋을 잃은 듯 서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방문한 날은 이(李)교수가 암이라고 통고받은 2일 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암이라는 사실을 통고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나는 옛적 일을 회상하였다. 명주완(明柱完) 학장님 밑에서 박진영(朴鎭泳) 교수가 교무과장이고 내가 학생과장으로 일하던 때가 있었다.
박(朴)선배가 입원하셨다. 박(朴)선배는 자신의 병이 간염이라고 믿고 계셨으며, 점차로 나아지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계셨다. 그러나 실상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에게는 이미 암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린 바 있었다. 결과가 뻔한 일이어서 본인에게도 알려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려하지 않았다.
학장께서는 나를 보고 국립의료원(國立醫療院)에 가서 외국인 의사들에게 물어보고 오라고 하신다. 지시하신대로 하였다. 국립 의료원의 스칸디나비안 의사들은 예외 없이 환자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해줬다. 가사정리도 하고 유언도 하기위해 절대로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학장님께 그대로 보고했다.
누가 박(朴)교수에게 알려야 하느냐로 옥신각신하던 끝에 병원장이시던 한심석(韓沁錫) 교수와 외과과장이시던 진병호(秦柄鎬) 교수가 이 일을 맡으시기로 했다. 두 분께서 그야말로 억지로 병명을 알려드리게 된 것이다. 나도 배석했다. 통고를 받으신 박(朴)선배님께서는 지그시 눈을 감으신 채 명상하는 모습으로 되시더니, 2일 후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떤 충격을 받으셨는지 모르지만 공연히 알려드렸구나 하는 후회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문화와 서양문화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동기생인 이성수(李聖洙) 학형의 경우가 회상되기도 한다. 이(李)형은 암병리(癌病理) 전공인지라 자신이 자신의 암(癌)을 진단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검사 소견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이(李)형이 그대로 지나갈 리가 없었다. 후배들을 나무라기도 하던 끝에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진단한 것이다.
이(李)형은 생(生)에 대해서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암이 어떤 병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李)형인데도 내가 문병 차 입원실에 가면 자기를 수술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하였다. 내가 수술(手術)의 ‘수(手)’자도 모르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李)형이었는데도 그의 요구는 대단했다. 하는 수 없이 수술실까지 데려가기도 했던 일이 생각난다.
이광호(李洸鎬) 교수의 경우에는 통고받은 직후에 부인이 더 크게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듣고 있다. 김용일(金勇一) 교수와 함께 문병 갔을 때, 입원실에는 고창순(高昌舜) 교수 등이 환자인 이(李)교수를 위로하고 있었다. 문병을 마치고 김용일(金勇一) 교수(당시 제2부원장) 등과 함께 제2부원장실로 갔다.
김노경(金潞經)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원래 이(李)교수의 주치의는 최규완(崔圭完) 교수였는데, 최(崔)교수가 대통령 주치의여서 대통령을 수행하여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병명을 알렸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이(李)교수의 부인으로부터 왜 알렸느냐고 하여 곤혹을 치렀다는 이야기다. 화학요법(化學療法)을 사용해야 했으며 어차피 이(李)교수가 알게 되어 있어서, 알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얼마 후에 들른 노관택(盧寬澤) 원장도 같은 내용의 설명을 해주었다. 노(盧)원장도 상당히 난처했던 모양이다.
이(李)교수는 92년 7월 23일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오다가 8월 25일 상오 10시에 향년 61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그는 남달리 건강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입원하기 전 체중이 감소하는 것을 골프 덕분이라고 기뻐했던 것으로 전해 듣고 있다. 골프를 남달리 좋아했으며 입원하기 직전까지도 즐긴 것으로 알고 있다.
나와 이(李)교수는 남다른 관계가 있다. 내가 서울의대 학장직을 맡고 있을 때, 그는 학생과장(學生課長)으로서 실력을 과시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치밀하면서도 남이 따를 수 없는 용기를 지닌 사나이였다. 모든 일을 시원하게 해결하곤 했다. 학생문제뿐만 아니라, 학교행정 전반에 걸쳐 그는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학장의 날(Dean's Day)을 설정하여 매월 학생들과 대화를 하게 한 것도 그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당시 대학원 교무과장이던 신동훈(申東薰) 학형과 함께 남산 도서관 옆에 있던 우동집으로 가서 이일 저일을 논의하던 광경이 떠오른다. 저녁을 같이 할 때도 많았다. 그의 가곡은 유명했다. 특히 ‘보리밭’은 일품이었다. 학생들과 야식을 할 때에는 빠짐없이 ‘보리밭’이 등장했다.
그 후 그는 본부의 학생 부처장을 거쳐 학생처장(學生處長)으로 활약했다. 그 동안에 얻은 경험과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학생운동을 소재로 한 저서를 펴낼 계획도 했었다. 해부학의 권위자로서 그의 존재는 대단했으며, 해부학의 중흥(中興)을 이룩한 인사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李)교수의 해부학 강의는 명강의로 이름나 있었다. 원래 웅변가의 소질이 있던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능란한 강의를 하여 학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의과대학 학장으로 취임한 후에는 그의 학문과 더불어 꿋꿋한 행정력(行政力)이 모교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런 한편, 스포츠의학에 대한 그의 집념 또한 대단했다.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 의무협의회 위원장, 대한 스포츠의학회장, 한국체육과학연구원 이사장 등의 요직을 맡아 스포츠와 의학을 접목시키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 활약한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기만 했다.
해부학의 권위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그는 해부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는 사후(死後)에도 그의 염원을 실현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운명하기 2주일 전에 그는 가족과 후배 교수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자신의 장기를 해부용으로 써 줄 것을 당부했다.
자신의 몸을 의학 연구에 써 달라고 한 그의 유언이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을 남겨 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명(幽明)을 달리하자 그의 장기가 떼어졌고 각막도 두 사람에게 이식되었다. 허준(許浚)의 스승 유의태가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제자에게 의학을 가르쳤다는 인상적인 이야기가 연상되기도 한다.
도하의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그의 거룩한 뜻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물론이다. ‘해부학 교수의 살신성의(殺身成醫) 실천’이란 제목으로 모든 매스컴이 그의 죽음을 자세하게 보도하였다. 많은 신문들이 사설을 게재하기도 했는데 그 중 92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의 사설을 소개한다.
이광호(李洸鎬) 교수가 남기고 간 감동
서울대의대(大醫大) 고 이광호(故 李洸鎬) 교수의 유해기증을 전하는 신문기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동안 적잖은 장기이식(臟器移植)을 위한 유해의 기증이 있어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거의가 본인의 의사가 아닌 유족들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었다. 최근에도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 고등학생의 장기가 부모들에 의해 기증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일이 있고 며칠 전에는 고혈압으로 뇌사판정을 받은 40대 남자가 유족들의 결단으로 여러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李)교수의 유해기증은 죽기 전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장기이식(臟器移植) 및 제자들의 해부실험용으로 기증됐다는 데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李)교수 자신이 생전에 학생들이 해부용 시체를 구하기 어려워 안타까워했고 급기야 자신의 유해를 기증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한 의인(醫人)의 높은 직업윤리와 교육자로서의 숭고한 열의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병원운영이 돈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교육현장의 교직자들이 교육의 본분인 진리 탐구와 헌신적인 학문의 전수보다는 개인적인 이기주의(利己主義)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오늘의 우리 교육의 위기(危機)의 핵심이다. 이런 이기주의(利己主義)가 극복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학문과 교육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李)교수의 ‘살신성의(殺身成醫)’의 희생은 세속화되어가는 우리 교육현장에 새로운 활로를 여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더욱 우리 사회는 아직도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뿌리 깊은 유교사상이 건재(健在)하고 있다. 단순한 사체(死體)라도 실제 이상의 윤리적 ․ 종교적 집착이 강하게 작용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대부분의 가족들은 죽은 사람의 시신(屍身)을 예(禮)를 다해 모심으로써 효(孝)의 성취를 달성하고자 하는 강한 인습(因習)에 젖어있다. 남강 이승훈(南崗 李昇薰) 선생이 자신의 유해를 그가 설립하고 평생을 운영해 오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실험용으로 기증하겠다고 유언한 일화는 이런 전통적 인습(因習)을 초월한 성자(聖者)의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다.
혼탁과 갈등의 와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이(李)교수의 학문의 전수와 의인(醫人)으로서의 직업윤리의 극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감동이요 구원이 아닐 수 없다. 겉으로 봐서 아무리 썩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우리 사회지만 이(李)교수와 같이 진리와 정의의 구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퇴보하거나 붕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희생일 수도 있는 이(李)교수의 유해기증은 적게는 동료교수나 후학(後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감동은 의학계뿐만 아니라 온 교직 사회에도 적잖은 충격과 함께 자성(自省)과 수범(垂範)의 불씨를 심어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李)교수의 희생과 헌신을 한때 지나치는 미담(美談)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며 교육자로서의 봉공(奉公)과 의인(醫人)의 직업윤리를 마음속에 깊이 새김으로써 우리 사회의 도덕성(道德性)을 회복케 하는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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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이광호 교수의 미담을 소개한 기사 (동아일보 1992. 8.2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