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통령, 4·13 호헌선언 (96회...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한편에서는 호헌 소문이 나도는 판이라, 나는 4월 2일 기자 간담회에서 우선 강력하게 민정·신민 양당의 무책임함을 성토했다.

“정국 주도의 책임이 있는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는 전권을 받았으면서도 소신껏 해나가기는커녕 전권을 받기 전과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한다면 난국을 풀어나가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민정당은 국회 소집과 정국 수습을 위해 구속자를 석방하고 사면·복권을 단행하며 지방자치제, 선거법 등 일년의 민주화 조치를 개헌의 흥정거리가 아니라 합의 개헌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조속히 수용조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수개월간 공당으로서 책임과 체통을 망각한 채 눈만 뜨면 당파 움을 거듭함으로써 국회의 운영이 정지되고 정국이 마비돼 왔다는 사실을 자성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내 심경도 털어놓았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신민당의 내분과 개헌 정국의 표류를 두고 정치인들을 향해 인간도 아니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어. 어디 나다니기도 쑥스럽고, 어쩌다 길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숨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무튼 고문 재발 방지와 같은 인권 문제, 그리고 농어촌 문제를 포함한 민생 문제, 개헌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임시국회가 조속히 소집돼야 합니다.”

기자 간담회를 끝낸 나는 바로 이재형 국회의장을 방문했다.

“임시 국회의 무조건 소집과 관련, 3당 대표회담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만일 개헌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시간만 흐른다면, 모든 정치인들은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불과 사흘 뒤인 4월 5일 계파 싸움을 벌이던 신민당은 중앙당사에서 양 김 씨 세력과 반 김 씨 세력 간에 충돌을 벌려 유혈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당시 신민당은 ‘이민우 구상’ 후 이를 지지하는 새로운 파벌이 생겨 반 양 김 세력을 형성 하고 있었다.

야당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국민들의 눈에 신민당의 사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민정당이나 신민당이나 뭐가 다른가” 하는 게 여론이었다. 게다가 4월 9일 두 김 씨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각각 이끌고 나와 신당을 만들기로 전격 발표해 버렸다. 신민당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결국 신민당의 분열은 정부 여당에 빌미를 주었다.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중대 발표를 했다.

“……본인은 지금까지의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그만두고, 현행 헌법으로 1988년 2월의 정권 교체와 올림픽이라는 양대 행사를 치른 뒤 다시 개헌 논의에 나서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아울러 민정당은 조속한 시일 내에 국민의 지지를 받는 인물 중 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할 것입니다.”

▲ 4.13 호헌조치를 헤드라인으로 1면을 거의 꽉 채운 동아일보 1987년 4월 13일자

내가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TV를 통해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듣는 순간, 예상한 대로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데 대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합의 개헌에 이르지 못한 정치권이 우선 잘못하긴 했다. 국민을 실망시키는 신민당의 분열과 이를 이용해 합의를 지연시키면서까지 결국 호헌으로 돌아선 정부·여당 모두에게 책임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호헌만은 반드시 철회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질질 끌긴 했지만, 개헌은 어쩔 수 없는 국민의 합의였다. 때문에 어떤 이유로든 개헌 자체를 정략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정치 일정이 촉박하다는 정부·여당의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밖에 남지 않아서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나 역으로 생각하면 합의 개헌을 하기 위해 노력할 시간이 아직도 1년이나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4·13 호헌 조치는 국민의 민주화 열망에 역행한 것이었다. 통치권자의 결단이라는 형식으로 정치를 부정한 것이었다. 신군부가 짜놓은 기본 통치 구조를 허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군정 청산과 민주화를 위해서는 직선제 개헌이 해결책이라는 국민 정서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변호사협회를 필두로 각계각층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종교계는 물론이거니와 교수·문인·언론인·법조인·예술인들의 항의 성명과 집회·시위·단식 농성·삭발 등이 그칠 날 없이 이어졌다. 당황한 정부·여당은 개헌 논의의 재개에 관하여는 공권력을 투입해서라도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강경 대응 조치를 선언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토록 어수선한 가운데 신민당의 극에 달한 내분은 국민을 더욱 실망시킬 뿐이었다.

5월 1일, 마침내 양 김씨는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동승동의 흥사단 강당에서 창당된 통일민주당은 신민당에서 탈당한 73명의 의원 가운데 66명이 참여함으로써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신민당에는 겨우 28명의 의원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당시의 5월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때문에 시끄러울 때였다. 그해도 예회가 아니어서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새로운 사건이 터졌다. 5·18 광주항쟁 희생자 추도 미사가 끝난 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조작됐다고 폭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