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은 다시 폭발했다. 처음 이 사실을 부인하던 검찰과 치안본부는 여론이 워낙 악화되자, 재수사를 하여 박 군의 고문치사범 축소 조작 모의의 진상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진상이 드러나면서 고문치사의 공법 3명이 구속됐고, 은폐 조작에 개입했던 치안본부 대공 간부 3명 역시 범인 도피 혐의로 구속됐다.
뿐만 아니라 내각도 총사퇴에 견줄 만큼 큰 폭의 물갈이가 있었다. 노신영 국무총리가 물러나고 이한기(李漢基) 서울대 교수가 총리서리에 취임했으며,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이 안무혁(安武赫) 씨로, 그리고 1월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김종호 내무에 이어 그 후임에 오른 정호용(鄭鎬溶) 내무장관도 4개월 만에 고건(高建) 씨로 교체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부총리·재무·법무·검찰총장 역시 정인용(鄭寅用), 사공일(司空壹), 정해창(丁海昌), 이종남(李種南) 씨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획기적인 진정책에도 고문전문가 이근안(李根安) 씨를 붙잡지 못했고, 일부러 안 잡는 듯한 검·경의 제스처에 국민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7일 재야와 통일민주당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출범시켰다. 6월에 접어들면서 잠재한 국민의 반군사독재 성향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야 운동권에서는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 조작 및 호헌 철폐 규탄대회 참여를 두고 당시 우리당 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분명했다.
“물론 나도 이 정권의 부도덕성을 규탄하며, 6·10 대회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는 바다. 그러나 정치는 원칙적으로 국회 내에서 하는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데는 정치인으로서 책임이 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깊이 반송하고 뉘우치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일 것이다.”
정부·여당은 “4·13 호헌 조치는 불변의 원칙으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6월 2일 저녁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핵심 간부회의를 열어 노태우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고, 6월 10일 전당대회에서 이를 승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집권세력과 범민주 세력은 6월 10일을 목표로 각각 앞만 보고 내달렸다. 서로 마주 보고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 같았다. 대격돌은 불을 보듯 뻔했다. 6월 9일, 6·10 대회를 앞두고 연세대 정문에서 또다시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연세대 교내 시위 중 이한열(李韓烈) 군이 경철이 쏜 최루탄을 맞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실려 간 것이다. 6월 10일, 나는 연세대 선배로서 걱정이 되어 이한열 군이 입원해 있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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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열 열사가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최루탄에 맞은 직후 촬영된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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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군의 병문안을 가보니 정문 앞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6·10대회 출정식’을 갖고 교외 진출을 시도하는 학생들이 던진 돌멩이와 이를 저지하려는 전경들이 무차별 쏘아댄 최루탄 냄새로 지나갈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곳을 지나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역시 들어서자마자 “한열이를 살려내라”고 쓴 리본을 단 수백 명이 병원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혹시 식물인간 상태인 이한열 군이 사망한다면 경찰이 납치해 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먼저 원장실로 찾아간 나는 진동식(陣東植) 의무 부총장과 홍필훈(洪弼勳) 세브란스병원장으로부터 이한열 군의 상태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현재 이 군은 왼쪽 귀 바로 위와 귀밑 부분이 각각 1센티와 4센티 정도 찢어져 있고, 그 틈으로 금속 이물질이 네다섯 개 박혀 있습니다. 이 금속 물질이 바로 뇌출혈을 일으켜 뇌를 붓게 하고 의식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뇌의 일부 기능이 상실된 상태라 산소호흡기로 연명하고 있으나, 결과는 낙관적이지 못합니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꽃다운 나이에 저런 고통을 다하게 된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잠시 후 강진경(康珍敬) 기획실장의 안내로 중환자실로 가서 이한열 군을 직접 만나봤다. 이한열 군은 산소호흡기를 단 채 누워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눈을 감은 채 고개 숙여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이 귀중한 생명을 살려주소서!’
말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이한열 군은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 일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만일 이 군이 끝내 숨을 거둔다면, 그건 나를 포함한 모든 정치 지도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중환자실을 나서는 나는 우울했다. 갑자기 시끄러워져 고개를 들자, 중환자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학생들이 내게 몰려왔다.
“한열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까?”
“아직 살아 있어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브란스병원을 나서는 내 마음은 한없이 슬펐다. 내게도 저만 한 자식이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 능력의 부족함을 한탄했지만, 한편으로는 똑같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모든 정치인들은 각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