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 국민대회는 예정대로 치러졌다. 이날 시위는 3831명이 경찰에 연행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시위 현장을 지나가던 차량도 경적을 울려 학생들의 시위에 동조했고, 시민들은 박수로 시위 학생들을 격려했다. 마침내 재야 운동권이나 학생들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까지 반독재 투쟁의 대열에 동참한 셈이었다. 6월 민주항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데도 민정당은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 길을 갔다.
민정당은 장충체육관에서 국민들의 뜻을 무시한 채 ‘전당대회 및 차기 대통령 후보 선출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노태우 당대표가 국민들의 예상대로 대통령 후보가 돼 후계자로 옹립됐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아이러니다. 거리에서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함께 현 정권의 부도덕성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외치면서 경찰에 잡혀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누가 뭐라든 자기들 마음대로 정치 일정을 강행하잖는가. 그것도 최루탄을 맞은 한 젊은 생명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데…….
그러나 6월 10일 민주화의 열기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의 전폭적지지 속에 더운 뜨거워졌다. 시위 학생들은 이날 밤 명동성당에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이튿날인 11일 명동과 남대문 일대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다시 모여 명동성당 농성을 지지하는 시위에 나섰다.
5공 정권은 그래도 강경 방침을 버리지 않았다. 민정당은 “6·10 시위 이후 서울 명동 일대가 불순 폭력세력에 의해 해방구로 선포된 데 대해 큰 충격과 우려를 금치 못한다”는 대변인 논평을 내놓았다. 5공 정권은 마치 최후의 칼을 뽑아들 태도였다.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13일 기자 회견을 자청했다. 난국 수습을 위한 기자회견이었다. 위기감이 감도는 가운데 열림 이날의 기자회견 요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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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0국민대회를 보도한 1987년 6월 11일자 동아일보 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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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이래 최대 난국을 맞고 있는 오늘의 위기 상황은 개헌을 열망하는 온 국민의 기대와 의지를 여지없이 짓밟은 4·13 호헌 조치와 이를 기정사실화하려는 민정당의 6·10 전당대회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 이 같은 정부 여당의 독단은 분명 민주화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역사적 오류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또한 제1야당의 장외 투쟁 역시 정국의 안정과 나라의 민주 발전에는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함을 엄숙히 지적한다.
여야의 대치가 마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정치가 아닌 전투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나라가 있고 난 후에야 대통령이 있고 당이 존재할 수 있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사고방식은 민주 국가에 있어서는 안 될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상태라면 올림픽은 제대로 치를 수 있을는지…….
만일 정치인들이 이성과 슬기와 자제로써 이 난국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나를 포함한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에게 깊이 사죄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만일 난국을 수습 못하고 나를 포함한 정치 지도자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는, 이른바 ‘합동 용퇴론(合同 勇退論)’을 편 것이다. 아울러 나는 여섯 가지 시국 수습방안을 내놓았다.
“첫째, 파국 양상의 극대화로 치닫고 있는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여야 간에 즉각 개헌논의를 재개할 것.
둘째, 개헌 문제를 비롯한 모든 시국 현안을 논의키 위해 즉각 4당 대표회담을 개최할 것.
셋째, 정부·여당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구속자 석방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조속히 단행하고 6·10 대회 때 연행된 시위 시민과 학생들을 즉각 석방할 것.
넷째, 여야는 사실상 운영이 마비돼 있는 국회를 즉각 정상화시켜 의회의 권능을 조속히 회복시킬 것.
다섯째, 시위 군중에 대한 경찰의 과인 저지와 무차별 최루탄 발사를 즉각 중지할 것.
여섯째, 연 나흘째 계속되고 있는 명동사태는 매우 심각한 지경에 있으며 현 정부가 이를 비상 정국으로 몰고 가는 구실로 악용하지 말 것.”
이어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국민이 갈망하는 대화 정국을 위해 여당은 이른바 통치권의 경직성에서 벗어나 대화 정치를 모색해야 하며, 또한 제1야당은 선명성과 극한적인 행동을 혼동해선 안 된다. 난국을 타개하는 지름길은 여야가 상대의 실체를 인정하고 무조건 대화에 나서 양보와 타협의 대승적인 정신을 보이는 길밖에 없다. 이제 시시각각 눈앞에 다가서고 있는 국가적 불행을 막고 진정한 문민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 지도자들은 사리사욕을 버리고, 역사와 국민 앞에 좀 더 솔직하고 겸허한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성명 발표가 있은 뒤 기자들의 질문이 있었다. 먼저 연합통신 기자가 물었다.
“이런 시위가 계속된다면 계엄령과 같은 비상조치가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정부·여당이나 야당은 모든 정치인은 비상사태가 선포되지 않도록 이성으로써 슬기롭게 이 난국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정치인들은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내가 강조한 것입니다.”
MBC 기자가 이어서 질문을 했다.
“민정당이 그들의 정치 일정을 계속 일방적으로 강행해 간다면, 국민당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의사가 있으신지요?”
“지금은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고 가서 될 시국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현행 헌법에 의해 대통령 선거를 강행한다면 이 나라에 비극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나는 이런 식의 대통령 선거에는 결코 참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