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조선일보》기자가 물었다.
“합의 개헌을 위한 일정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국회 헌특위에는 3당 개헌안이 제안돼 있으니, 결심이 문제지 시간이 문제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국민 여망에 따라 개헌을 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당시 혼란한 상황에서 나의 ‘난국 수습을 위한 기자회견’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동아일보》는 6월 15일 사설에서 나의 회견 내용을 인용했다.
“작금의 상황은……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연세대생 이한열 군의 생명을 지켜보는 것만큼이나 안타깝고 조마조마하다. 명동성당에서 엿새째 벌어지고 있는 농성의 사태 진전은 또 얼마나 가습 죄는 일인가…….
이런 답답함 속에서 당의 크기도 작고 책임도 작은 국민당의 이만섭 총재가 공동책임론을 펴서 눈길을 끈다. 그는 ‘나라가 있고 난 뒤에 정권이나 당이 존재하므로, 정치인들은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의 불안한 눈초리와 경멸·불신의 시선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면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이 난국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국민에게 깊이 사죄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합동용퇴론을 폈다고 한다…….
또한 ‘올림픽조차 치를 수 없는 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지적, 개헌 논의의 즉각 재개와 명동시위 사태의 평화적 해결 등 6개 항의 시국 수습방안을 제시했다. 그의 지적대로 정치 위기 때문에 올림픽마저 치러내지 못한다면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민족적 망신이 또 어디 있겠는가…….”
16일에는 《조선일보》도 사설엣 ‘이런 해결 방안도 있다―국민당 이 총재이 견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일초즉발의 위기가 일단 지나가고, 정계에선 다시 정치로 풀자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국민당의 이만섭 총재는 이와 관련해 하나의 해결 방식을 제의해 눈길을 끌었다. 이 총재에 의하면 지금의 미증유 난국은 ‘4·13 조치로 개헌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포기한 정부·여당에 전적으로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야간에 개헌 논의가 즉각 재개돼야 하며, 이를 성사시키기 위한 4당 대표회담, 국회 기능 회복, 헌특위 재개 또는 새로운 기구의 설립 등을 제창했다. 요약하건대 이 총재의 주장인즉, 집권 측은 개헌 논의의 재개에 양보하고 민주당은 필리핀 방식에의 경사(傾斜)보다는 협상 방식으로 임하라는 요구라 할 수 있겠다.
이 총재의 제안이 과연 현실적으로나 정황적으로 적실성(適實性)을 갖는 것이냐 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이 총재가 내린 난국의 진단 자체는 여야가 한 번 허심탄회하게 되씹어볼 여지가 없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럴진대 민주당은 이 헌법의 논쟁 극복을 장외 투쟁에서 결말지으려는 제1야당의 노석을 비판한 이 총재의 말을 여당이나 마찬가지로 깊이 참고할 만도 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해야 하며, 해내지 못하면 공동의 대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꼭 국민당 이만섭 총재의 말이 아니더라도 여야는 구국 차원에서 피차 국면 전환을 위한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기 바랍니다.”
그러나 당시 나의 기자회견이나 각 신문의 사설이 이처럼 정국 안정을 위한 대한 제시 등을 촉구했건만, 6·10 이후 극심해진 혼란상은 전국을 뒤덮고 있었다. 민주당과 재야는 계속 직선제 개헌을 위한 시민대회에 나서 전국의 도시는 밤낮없이 시위에 휩싸여갔다. 이젠 경찰의 공권력만으로는 한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급기야 일부 도시에서는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경찰차가 불타는 등 시간이 흐를수록 무정부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6월 18일에는 남해고속도로가 시위대에 의해 점거돼 3시간 동안이나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으며, 19일 밤 11시경 대전의 야간 시위에서는 시내버스를 탈취한 시위대가 그대로 진압 경찰 쪽으로 돌진해 그 자리에서 박동진(朴東鎭) 일경이 사망하고 2명의 전경들이 중상을 입는 불행한 사태까지 발생했다.
민심도 흉흉해 갔다. 워낙 전국이 혼란스럽자 곧 위수령이나 계엄령 같은 비상조치가 단행될 것이라느니, 서울 인근 지역의 공수부대가 이미 이동하고 있는 게 목격됐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일부 국민들은 제2의 광주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5공 정권도 위기감을 느껴 여권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마침내 노태우 대표는 내가 제안한 4당 대표회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각 당 대표들에게 개별 회담을 제의했다. 나와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20일로 날짜가 잡혔다. 그러나 기대했던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는 전 대통령과의 직접 면담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며 노태우 대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와 노태우 대표의 회담은 6월 20일 오전 9시 반 국회의사당 귀빈식당에서 열렸으며, 나와의 회담에 이어 노태우 대표는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같은 장소에서 회담을 가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