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대표와 회담키로 한 6월 20일,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국회에 등원해 총재실에 들렀다. 거기엔 이미 기자 몇 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한 기자가 물었다.
“회담에 임하는 심경은 어떻습니까?”
“오늘 민정당 대표와의 회담은 내가 이미 지난번 기자회견에서 제의한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시국 수습을 막기 위해 그나마 다행스런 일입니다. 아무튼 지금은 나라의 불행을 막기 위해 모든 정치력을 총동원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난국 수습을 위해선 노 대표와 김영삼 총재의 회담도 리 이뤄지길 희망하는 바입니다. 김 총재가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것도 좋지만 난국 수습을 위해선 누구든지 만날 수 있는 폭넓은 마음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내 힘이 필요하다면 물론 내가 노·김 회담을 주선 할 수도 있습니다.”
회담장인 2층 귀빈식당에 올라가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 노태우 대표가 올라왔다. 악수를 나눈 뒤 사진기자들이 포즈를 취해 달라는 부탁을 하자 노태우 대표는 농담으로 받았다.
“나로서는 오늘 이만섭 총재로부터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하는 입장이니, 이 총재 사진을 많이 찍어주시지요.”
그러나 나는 왠지 국민에게 부끄러웠다.
“지금은 사진이 신문에 나가는 것도 국민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진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빨리 시국을 수습해야지요.”
그러자 노 대표가 쑥스러운지 말을 받았다.
“정치인의 입장에서 당연히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이렇게 우리가 만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요.”
사진을 찍고 취재진을 내보낸 뒤 본격적인 회담에 들어갔다. 회담장의 테이블은 상당히 컸다.
“원탁 테이블이 너무 크군요. 작으면 훨씬 더 부드러울 것 같은데…….”
노 대표는 직원을 불러 테이블을 작은 것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잠시 후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으니 얼굴이 훨씬 가깝게 보이는 것이 역시 좋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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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 귀빈식당에서 노태우 대표와 만난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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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학생들이 다치고 전경이 죽는 등 우리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맞붙어 싸우는 불행한 사태는 모두 우리 정치인들의 책임입니다.”
“그렇습니다.”
노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말씀 중 ‘필사즉생(必死卽生)이요 필생즉사(筆生卽事)’라고 했으니 옳은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영원히 삶을 얻는 것이며, 소아小我 에 매달려 살려고 하면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옳은 것이란 당연히 대통령 직선제이고, 소아란 호헌 조치를 부른 권력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또한 ‘필사즉생이요 필생즉사’는 내 좌우명이기도 했다.
“물론 나도 자리에 연연치 않겠습니다. 내가 발 벗고 수습에 나설 것입니다.”
노 대표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나는 왠지 회담이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워낙 시국이 중대 국면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 간에 격의 없는 의견 교환을 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은 뒤 내가 먼저 시국 수습을 위한 7개 항을 내놓았다.
“첫째, 4·13 호헌 조치의 즉각 철회. 둘째, 헌특위 또는 여야 중진 회담기구를 통한 개헌 논의 즉각 재개. 셋째, 6·10 사태와 관련된 구속자의 즉각 석방. 넷째, 시위 학생에 대한 과잉 단속과 최루탄 남발 즉각 중지. 다섯째, 김대중 씨의 가택 연금 해제. 여섯째, 인권 보장과 언론 자유 등 민주화 조치 단행. 일곱째, 국회의 조속한 정상화.”
이 일곱 가지 사항은 불과 9일 뒤 나온 6·29 선언과 맥을 같이 하는 내용들이었다. 내가 일곱 가지 사항을 제안하자 노 대표의 반응은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잘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방안을 세우지요.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흔히 본인이 정권을 탐내고 정권욕에 사로 잡혀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본인이 생각하기로는 본인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해 준 민정당 160만 당원의 뜻은 본인의 몸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이 난국을 풀어나가라는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현재 각계각층의 여론과 민심을 낱낱이 수렴하고 있으니, 내일 의총을 통해 종합하여 내주 초쯤 민정당의 시국 수습방안을 밝힐 것입니다.”
이날 1시간 10분에 걸쳐 진행된 회담에서 우리는 세 가지 원칙에 합의했다.
“첫째, 오늘의 불행한 사태는 정치력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극복해야 한다. 둘째,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폭력적인 방법이나 공권력에 의해 비상조치가 초래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셋째, 이를 위해 여야 정치 세력은 끝까지 인내와 자제로써 대화와 타협을 통해 난국을 수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