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제 수용 전 대통령, 노 대표...

나는 이 밖에도 6·10 사태 및 시국 관련 구속자의 전원 석방, 인권 보장 및 언론 자유 등 민주화 조치, 김대중 씨와 정치 규제자들에 대한 사면 복권 단행, 정국 수습을 위한 비상 수습 내각 등도 거론했다.

회담 말미에는 인간적인 설득도 병행했다.

“저는 대구 촌사람으로 한 당의 총재까지 하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더 바랄게 없지요. 또 대통령께서도 옛날에는 대통령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니 여한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주저하실 게 뭐 있겠습니까?”

전 대통령은 내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대통령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얘기를 노 대표에게도 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노 대표에게도 충분히 얘기했습니다. 대통령께서 결심만 하시면, 제가 노 대표를 다시 만나 마음을 굳히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때 전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의리를 앞세우는 그가 자신은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쉽게 대통령이 된 반면, 후계자인 노 대표에게는 위험한 도박인 어려운 직선제의 길을 가라고 하기가 인간적으로 미안한 생각에서 망설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 그날 내 말을 진지하게 듣던 전 대통령은 바로 그날 저녁 즉각 노 대표를 청와대로 불렀다고 한다.

1999년 6월《월간조선》과 가진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날 저녁 전 대통령은 청와대로 달려온 노 대표에게 “직선제를 해도 이기지 않겠소”라며 강하게 직선제를 권유했고, 이에 노 대표는 “직선제로 과연 이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노 대표는 당시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는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마음에서 ‘그게 되겠느냐’는 식으로 반어법을 썼었다고 그 인터뷰에서 술회했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은 이 인터뷰에서 ‘상시 이만섭 총재를 두 번이나 만났으며, 이 총재가 대통령 직선제를 강력히 권유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날 6·24 청와대 회담은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의 첫 만남이었기에 각 신문은 김영삼 총재와의 영수회담에만 초점을 맞춰 1면에 크게 보도했고, 나와의 회담내용은 청와대 공식 발표문만을 2면에 실었다. 그러나 내가 직선제를 강력하게 권유한 내용은 그 발표문에도 분명히 실려 있었다.

▲ 6·24 청와대 회담은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의 첫 만남이었기에 각 신문은 김영삼 총재와의 영수회담에만 초점을 맞춰 1면에 크게 보도했다

이날 청와대에서 발표한 공식 발표문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대통령 오랜만입니다.

이만섭 총재 여러 가지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는 나라가 있고 나서 대통령도 있고 정당 총재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과거 역대 대통령 중에 임기를 다 채우고 무사히 청와대에서 물러간 대통령이 없었습니다. 대통령께서 물어난 후 역사에 영원히 빛나기 위해서는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은 헌법의 내용보다도 대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겠다는 것입니다. 끝내 개헌 합의가 안 될 경우 선택적 국민투표를 하는 방법도 있기는 합니다만……. 나는 지금 데모가 특정 정치인을 지지해서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정국을 안정시키고 올림픽도 잘 치르고 민주주의 전통도 살려나가기 위해서는 깨끗이 직선제 개헌을 하여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전두환 대통령 지금 헌법에서 내가 항상 유념하는 것은 이 헌법이 집권자를 견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헌법은 변칙적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민정당이든 야당이든 양보를 해서 국회에서 진짜 논의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당간에 대화로 정치력을 발휘해서 국민의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서 생각해야 합니다. 민정당이라고 해서 국민의 참뜻을 모르겠습니까? 야당도 각기 다 민의를 수렴하고 있을 테니 정치인이 발 벗고 나서면 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떠나는 사람이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나라가 잘 되어야 대통령도 있는 것입니다.

나는 헌정 수호와 국가 보위, 국민의 자유 복지 증진, 평화통일 등 대통령으로서의 의무를 다해 나갈 것입니다. 나는 이제 퇴임 8개월을 남겨놓은 통치권자로서 정국을 이끌어가는 책임과 권한을 모두 노 대표에게 주었습니다. 민정당 노 대표에게 “정국을 이끌고 야당과 대화하는 것 모두 책임지고 하라. 그 결과를 알려주면 나는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총재께서도 노 대표를 만나서 기탄없이 얘기하시기 바랍니다.

이만섭 총재 일부에서 주장하는 선택적 국민투표는 국력 낭비와 소모를 가져올 뿐입니다. 차라리 떳떳하게 연내에 직선제 개헌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두환 대통령 모든 것은 국회에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헌법에 의한 헌법의 개정이 되어야지 변칙은 안 됩니다.

이만섭 총재 평화적 정권 교체와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서 불가피할 경우에는 비상 수습 내각을 구성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대중 씨 사면 복권, 시국 관련 사법 석방, 인권 보장, 얼론 자유화 조치도 취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문제에 대해서 외국에서 이런저런 소리를 하니 민족적 자존심이 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힘으로 해결해서 자라나는 후배들에게도 귀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올림픽도 우리 민족이 결속해서 치러야 하겠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우리나라의 정치는 변화와 정변이 많아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어려웠습니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면 국가가 부흥합니다. 약속 민족의 운명은 비참한 것입니다.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동안 나라를 책임져 오면서 느끼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나라가 잘 되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