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회담 이후 나는 곧 정부·여당이 직선제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5일 뒤인 29일에 역사적인 ‘6·29 선언’이 나온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 이양 실현, 공정한 경쟁을 위한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 씨 등의 사면 복권과 시국 관계 사범의 석방, 인권 존중을 위한 국민 기본권 강화, 언론 자유의 보장, 기방자치의 실현 등 사회 각 부문의 자치 자율권 보장, 정당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의 강구” 등 모두 8개 항으로 된 6·29 선언은 16년 간 쌓여 있던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일시에 수용했던 것이다.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전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것을 간곡히 설득했다.
1987년 6월 24일 청와대 영수회담이 끝나갈 무렵 전 대통령은 나에게 노 대표를 만나 한 번 더 설득해 줄 것을 부탁한 일이 있다.
“노 대표를 한 번 더 만나주시지요.”
때문에 나는 다시 플라자호텔 룸에서 노 대표를 만나 인간적인 의리로 고민하는 전 대통령의 심경을 얘기하고 설득했던 것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직선제를 하는 것이 나라와 노 대표 모두를 위한 길이요.”
내가 그렇게 간곡하게 말하자 노 대표 자신도 “나도 직선제를 건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계를 은퇴할 생각입니다”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그리고 며칠 뒤 바로 6·29 선언이 나온 것이다. 아무튼 후일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노 대표나 전 대통령에게 내 설득이 상당히 주효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당시 나와 전 대통령의 회담에 배석했던 청와대 김성익(金聲翊) 부대변인이 1992년 발간한 자신의 저서 《전두환 육성증언》에도 그날의 분위기가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전 대통령과 이만섭 총재와의 회담에서는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깊은 얘기가 오갔다. 전 대통령에게 직선제를 수용하는 결단을 내리도록 권하고 있는 이 총재의 자세는 요구가 아니라 설득이었다. 이 총재는 반대자의 입장에서보다 전 대통령을 위하고 전 대통령과 같은 입장에서 정곡을 찌르는 논리와 어법을 구사하면서 조목조목 이해득실을 따져서 얘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 대통령은 이 총재가 얘기를 하는 동안 대단히 진지하고 진중한 표정으로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전 대통령의 반응은 그의 대답에서도 나타나지만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문제에 있어서 이 총재의 얘기에 완전히 공감한다는 방향이었다.”
노 대표의 경우는 6·29 선언 후 가족들에게도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후일 나의 중학교 동창이며 노 대표의 동서인 금진호(琴震鎬) 의원에게 들었던 얘기다.
“내가 6·29 구상을 할 때 가장 도움을 준 사람은 국민당의 이만섭 총재이다.”
또한 전 대통령의 경우도 후일 백담사로 찾아간 조계종의 서의현(徐義玄) 총무원장에게 비슷한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6월 24일 여야 영수회담이 끝난 뒤 이종률(李鍾律) 청와대 대변인은 전화로 우리 당의 최용안(崔容安) 대변인에게 “전 대통령이 이만섭 총재에게 가장 감명을 받았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한 바도 있다.
아무튼 6·29 선언으로 나라는 큰 경사를 맞은 것처럼 기쁨에 넘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즉각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노 대표의 결단은 훌륭한 것으로 민심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7월 5일에는 슬픈 일도 있었다. 6월 9일 연세대 정문 앞 시위에서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으로 사경(死境)을 헤매던 이한열 군이 한 달 만에 끝내 눈을 감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직선제 개헌의 기쁨보다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앞섰다. 때문에 남들처럼 요란스럽지 않게 나 혼자 조용히 연세대에 마련된 그의 빈소를 다녀왔다.
7월 10일 전 대통령이 민정당 총재식 사퇴를 선언하고, 그날 김대중 씨와 문익환 목사 등 총 2335명이 사면 복권 또는 석방되면서 정국은 모름지기 대선 정국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