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대표가 야당 당사를 찾은 건 헌정사상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노 대표는 내게 사의를 표했다.
“나의 제안이 발표되자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방들까지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 자신도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리고 6·29 선언이 나오기지 이 총재께서 여러 가지로 좋은 말씀을 들려주고지지 논평지 해주신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도 말을 받았다.
“이제는 후속 조치가 중요하니 하루빨리 국회를 정상화하고, 4당 대표회담과 중진회담을 열어 앞으로의 정치 일정을 조속히 매듭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갈 길은 먼데 개헌 협상은 쉽사리 시작되지 않았다. 제1야당인 민주당이 본격적인 내분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당시 해금된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은 7월 17일 불출마 선언을 번복, 대선 경쟁에 뛰어들었다. 양 김 씨의 경쟁은 1980년대 상황을 재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국민들이 직선제 개헌을 빨리 매듭짓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18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개헌 협상을 강력히 촉구했던 것이다.
“오늘의 민주화 물결은 민정당 단독의 결단에 의한 것도 아니고, 민주당만의 노력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직 국민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이런 상황을 마치 전리품으로 여기는 양 김씨의 생각은 민주화를 저해하는 독단과 아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마치 개헌 협상도 시작되기 전에 청와대에 다 들어간 것 같은 양상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대통령 선거 자체를 가능케 할 것이냐에 전력해야 하는 것인데, 청와대에 들어갈 꿈만 꾸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사회도 시끄러워졌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각종 욕구들이 일시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7월 23일 부산 태광산업 근로자 1천여 명이 어용노조 해산을 요구하며 회사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였으며, 그 이후 유행처럼 노동재의가 전국으로 퍼져 사회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국민의 눈을 의식한 민주당은 결국 개헌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시초부터 비민주적인 방식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원칙을 무시한 채, 민정·민주 양당만의 원내총무·사무총장 회담으로 7월 30일 오후 3시 개헌 협상을 위한 제1차 8인 정치회담을 갖는다고 발표한 것이다.
소수당을 배제한 기막힌 일이었다. 게다가 그 8인 회담이란 것도 민정당 위원 4명, 민주당 의원 4명만으로 구성됐다. 도대체 민정·민주당을 제외한 우리 국민당과 신민당 의원 56명은 의원이 아니란 말인가. 양당의 횡포였다. 국민의 헌법을 만드는 정치 협상이라면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당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소수당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이다.
국민당은 의총을 열고 민정·민주 양당에 경고를 했다.
“우리는 민주주의 정도를 벗어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특정 정당의 당리당략이나 개인적 이해관계에 얽혀 졸속으로 국가 대사가 결정지어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음을 밝힌다.”
사실 헌법을 만드는 의원들이, 또한 교섭 단체를 갖고 있는 정당이 헌법 개정에 참여치 못한다는 것은 공당公堂으로서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국민당은 의원내각제로 기울어지기도 하던 타당과는 달리 줄곧 일관되게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해 온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두 김씨에게 항의를 하거나 협조를 요청하지는 않았다. 헌특위 구성을 맨 처음에 제안했고, 영수회담 등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는 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사실은 국민이 평가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언론이 우리 편이 돼주었다. 결국 민정당과 통일 민주당은 8인 회담과는 별도로 신민당, 국민당과의 개별 정치협상도 병행하기로 했다.
8월 2일 여야 간 중진회담이 처음으로 열리면서 개헌 작업은 시작됐다. 그리고 8일에는 김대중 민추협 의장이 민주당에 입당, 상임고문으로 취임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9월 18일 마침내 역사적인 대통령 중심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에서 통과됐다.
의외로 개헌안이 쉽게 통과된 이면에는 당시 민정당이나 야당의 김영삼, 김대중 씨 모두가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헌이라는 것이 대통령 선거 방식만 바꾸는 게 아닌데도, 양쪽에서는 오로지 권력 구조 및 대통령 선출 방식에만 집착하다 보니 나머지 문제에 관심을 덜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 문제라는 것은 사실 대통령 중심제는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처음 협상 과정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줄이려고 했으나 대통령 후보가 되려는 자 모두가 스스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겨우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 정도만 삭제했을 뿐, 나머지 대부분은 군사정권 때의 막강했던 대통령 권한을 그대로 내버려둔 점이다.
지금에 와서 대통령 권한이 제왕적이라고 하여 그 권한을 분산해야 된다는 여론이 일어나는 것도 당시 이러한 문제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를 우려했던 양 김 씨의 대립은 표면화됐다. 국민들로서는 ‘제발 80년대 초를 재현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헛수고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