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우선 김종필 씨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야당 후보가 단일화 돼야 하는 것이며, 내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 우리 당이 분열되고 있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김종필 씨는 계속 우리 당의 의원들과 접촉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김종필 씨의 사촌 동서인 한병기(韓丙起 씨ㆍ전 캐나다 대사)를 통해 연락을 취했다.
9월 7일 우리는 청구동의 김종필 씨 자택에서 점심을 하면서 당신의 정세 등에 대해 의견 교환을 하게 됐다. 나는 세간에서 궁금해 하는 사항을 물어보았다.
“정말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작정입니까?”
“뭐 딱히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서 나간다기보다는 제1야당이 되어 나라에 기여하는 데 더 뜻이 있지요…….”
역시 그는 은근히 정계 복귀와 대선 출마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그가 우리 당으로 들어오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다면 전에 내가 밝힌 바 있지만, 김 총재가 아예 우리 국민당에 들어와 정치를 재재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기꺼이 총재직을 내놓고 백의종군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서로에게 바람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의 전격적인 제의에 그는 다소 당황하는 듯했다.
“그건…… 좀 더 시간을 갖고 연구해 보지요……. 다음 주에 다시 만나 얘기합시다.”
그날 헤어져 돌아왔지만, 여전히 김종필 씨는 신당 창당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불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당 의원들도 동요도 심해졌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결론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에 22일 아침 하얏트호텔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제의했다.
“어차피 신당을 만들 바에야 그 신당과 우리 국민당이 합당을 합시다. 합당의 조건은 단 한 가지. 그건 현재 국민당 의원 중 지역구로 출마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지구당 조직책만을 보장해 주면 됩니다. 그래야만 나도 합당을 반대하는 의원들을 설득할 명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 대 당 합당이 여러모로 모양도 좋겠지요.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평당원으로 백의종군할 테니 나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속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건 국회의원 각자의 입장과 사정이 다를 테니 행동 통일을 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 의사에 맡깁시다.”
결국 그는 내가 제안한 당 대 당 통합을 방해하고 말았다. 하얏트호텔에서 당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결심했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리고 설사 혼자 남는 한이 있더라도 당을 지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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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필 씨는 나의 국민당과의 당대당 통합 제안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매일경제 1987. 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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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당 대 당 합당이 이처럼 불가능해지자 12대 국회를 마감하는 10월 정기국회 회기 동안 우리 당의 김용채(金鎔采), 김광수(金光洙), 조용직(趙容直) 의원 등 6명이 김종필 씨가 창당한 신민주공화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그럼으로써 국민당의 원내 교섭단체 지위도 무너져버렸다. 교섭단체가 무너지자 바로 민정당에서도 우리 당 의원들에게 포섭 공작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했다. 특히 민정당은 대통령 선거전에 대비, 우리 당뿐만 아니라 다른 당 의원들에게까지 다음 선거 때 공천 보장을 미끼로 포섭 공작에 열을 올렸다.
나는 처음엔 그런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했으나 민정당의 입당 제의를 받고 고민하는 의원들이 내게 그 사실을 털어놓아 알게 되었다. 특히 지방 출신 의원들의 경우는 권력과 금력을 가진 집권 여당이 차기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당연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신민주공화당으로 옮긴 사람들이야 김종필 씨와 친분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다지만 집권당의 처사는 분명히 비도덕적인 것이었다.
마침 10월 어느 날 63빌딩에서 대한치과의사회 창립총회 리셉션이 있어 각 당의 총재들이 초청을 받아 참석하게 됐다. 나는 일찍 도착해 시간이 남아 우연히 현관에서 마주친 민정당 노태우 대표와 55층의 ‘거버너스 체임버’에서 차를 한 잔 나누게 됐다.
노태우 대표가 먼저 물었다.
“이 총재께서도 이번 대선에 출마하실 겁니까?”
그러나 내 생각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출마할 생각이 전혀 없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고. 제발 우리 당 의원들을 빼내 가지 마십시오.”
“빼내 가다니요…….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즉각 중단시키겠습니다.”
그러나 그날 노 대표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민정당과 당국의 집요한 공작은 계속돼 결국 양정규(梁正圭) 의원 등 8명의 의원들이 민정당으로 옮기고 말았다. 나와 함께 끝까지 남아 있던 의원은 김영생(金永生)ㆍ황대봉(黃大鳳)ㆍ이대엽(李大燁) 의원 등 모두 6명뿐이었다.
끝까지 남아 있던 의원들은 나와 특별히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평소 의리 있는 동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총선을 앞둔 시점이라 향후 진로와 나와의 인간적인 의리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막을 힘도 명분도 없었던 나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다음 선거를 위해서라면 마음 편히 떠나도 좋소”라고 그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결국 그들은 나의 양해를 구한 후 모두 당을 떠났고, 나 혼자만이 외롭게 남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