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서글픔과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25년 동안 정치 생활을 하면서 그처럼 깊은 상처와 외로움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떠나간 의원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나는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노 대표는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결국 13명의 의원들을 빼간 격이 됐다. 그 점을 나에 대한 인간적·정치적 부채로 생각해서인지 3당 합당 이후 14대 때 민주자유당 전국구 의원으로 나를 영입했다.
마침내 대통령 선거일이 12월 16일로 정식 공고된 후 본격적인 선거전이 시작됐다. 개정된 선거법은 거의 무제한으로 선거운동을 보장하고 있었다. 때문에 선거는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극단적인 한판 승부로 흐르고 있었다. 나올 만한 선거 공약은 모두 나왔고, 무제한의 선거 자금이 전국에 뿌려졌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국민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야권 단일화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김영삼, 김대중 씨는 서로 승리를 장담하며 단일화를 거부했던 것이다.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김대중 씨는 김영삼 씨가 나옴으로써 영남 표가 분산돼 오히려 자신이 유리하다가 판단했으며, 김영삼 씨는 정치 보복을 싫어하며 안정을 바라는 많은 중산층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른바 1노 3김의 대결인 셈인데, 사실 나는 속으로 ‘3김’이 분열된 상태에서는 누구든 아무리 많은 표를 얻는다 해도 집권 여당의 프리미엄을 갖고 있는 ‘1노’를 이기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단일화 돼도 집권할까 말까 한데 서로 싸우니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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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열했던 1노 3김의 대선 선거유세 대결 기사 (동아일보 1987. 1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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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11월 28일에는 변수가 생겼다.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태국의 방콕을 향해 가던 대한 항공 858편 보인 707기가 버마(현 미얀마) 근해인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발해 탑승객 115명이 전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KAL 기 폭파사건’인데, 범인 김현희(金賢姬)는 라디오와 술로 위장한 고성능 폭탄을 좌석 선반 위에 놓은 채 바레인 공항을 빠져나가다 위조 여권임이 탄로나 붙잡히게 됐다. 그렇듯 정세도 여당 측에 유리하게 돌ㅇ가고 있었는데, 양 김씨는 여전히 서로 헐뜯기만 할 뿐이었다.
투표일을 이틀 앞두고는 민주당 쪽에서 ‘김대중 후보 사퇴’라는 제목의 당보를 제작해 뿌렸고, 이를 평민당 측에서 맹렬히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그나마 야권 분열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국민들을 더욱 실망시켰다. 이는 부동표가 노태우 대표에게 몰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게다가 치밀한 정부·여당은 선거 바로 전날 바로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한국으로 압송해 국민의 안보 심리를 자극하는 고도의 전략도 썼다. 이토록 한쪽은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다른 쪽은 분열된 채 서로 싸움만 하고 있으니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선거 기간 중 나는 초연한 입장이었다. 때문에 선거 중에는 의외로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선거 결과에 대해 묻기도 했다.
미국의 시거 국무부 차관보를 비롯해 더위스키 백악관 특별보좌관, 솔라즈 미 연방하원 위원장 등이 나를 찾아와 물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는 외국 대사들이 자주 나를 찾아와 선거 결과에 대한 의견을 들으려 했다. 아마도 내가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평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내 대답은 분명했다.
“3김씨가 저렇게 나뉘어 싸우고 있고, 여당은 막대한 조직과 자금으로 움직이고 있는 걸로 봐 여당이 당연히 유리하다.”
드디어 1987년 12월 16일 투표가 끝난 뒤, 개표 결과를 기다리던 많은 국민들은 자정이 지나기도 전에 분노와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980년 의 봄이 채 개화되지 못한 채 산산조각이 난 이후 7년을 기다려왔건만, 또한 16년 만에 직선제를 쟁취하여 정권 교체의 여건이 마련되었건만 양 김 씨의 분열로 그 꿈은 다시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과는 내 예상대로 3김 씨의 철저한 패배였다. 노태우 후보는 828만 2738표를 얻어 36.6%라는 지지율로 20%대의 지지율에 그친 양 김 씨를 누르고 당선됐다. 당시 3김 씨는 김영삼 후보가 633만 7000여 표로 28%, 김대중 후보가 611만 3000여 표로 27%, 그리고 김종필 후보가 182만 3000여 표로 8.1%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특히 지방색이 두드러진 게 특징이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경북에서 69.8%와 64.8%를, 그리고 김영삼 후보는 부산과 경남에서 55%와 50.1%를, 김대중 후보는 광주와 전남에서 93.8%와 87.9%를, 김종필 후보는 충남에서 43.8%의 지지를 받았다.
아무튼 집권 여당인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다음날인 17일에는 사상 최대의 주가 폭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