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으로 인해 잠시 조용했던 정치권은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11월 2일 국회에서 5공 비리에 대한 청문회가 시작됐다. 언론 사상 최초로 생중계된 청문회는 각종 비리와 부정을 부분적으로나마 폭로해 국회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한편 밀실 정치를 공개 정치로 유도하고 대중의 정치 참여를 높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었다.
‘5공 비리’ 청문회는 이미 1988년 3월 31일 전두환 대통령의 친동생인 전경환(全敬煥) 씨가 구속된 데 이어 연말에는 형 전기환(全基煥) 씨, 처남 이창석(李昌錫) 씨까지 구속되는 등 전두환 대통령 일가의 수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전두환 씨는 11월 23일 정치자금 139억 원과 연희동 사저(私邸)를 국가에 헌납한 채 부인 이순자 씨와 함께 백담사로 은둔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이 밖에도 광주 문제, 언론 문제 등도 청문회에 올랐다. 아무튼 13대 총선 결과 여소야대를 자초한 정부·여당은 계속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1989년 초반의 정치적 이슈는 과연 노 대통령이 선거 때 공약으로 내세운 ‘중간평가’를 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이민우 총재와 나, 그리고 이철승(李哲承) 씨 등 당 대표를 지낸 원로들을 청와대에 초천하여 만찬을 함께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중간평가에 대해 우리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때 나는 노 대통령에게 “헌법이 허용한다면 국민이 나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3김 씨를 선택하라는 식으로 역사의 심판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사실 노 대통령도 처음에는 중간평가를 받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당시는 행정 선거가 통하던 시대라 지방 군수들에게까지 지시를 내렸고, 심지어 자금까지 마련해 놓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중간평가 문제는 여당에서 박철언(朴哲彦) 대통령 정책담당보좌간이 앞서 반대했고, 야당의 3김 씨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특히 제1야당인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노 대통령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반대했다고 한다.
“헌법에도 없는 중간평가를 구태여 왜 하려 합니까? 헌법에도 없는 중간평가는 하지 마십시오.”라고 강력히 건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 당시 대한 변협도 “중요 정책이 아닌 정치적 성과를 평가하는 국민투표는 명백히 위헌”이라고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결국 중간평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나 당시 분위기로 보아 중간평가를 했더라면 여당에 유리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점도 있다. 만일 중간평가가 헌법에 위배되지 않아 그때 실제로 국민투표를 했으면 이 나라 정치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3김 시대’의 변화도 빨리 오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역주의를 타파하여 새로운 정치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1989년 3월 20일 노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중간평가를 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 닷새 뒤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문익환(文益煥) 목사가 통일민주당 유원호(劉元琥) 씨, 재일在日평론가 정경모(鄭敬謨) 씨와 함께 북한의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한 사건이 터졌다. 재야와 학생들은 ‘순수한 통일에의 열정’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감쌌으나 결국 정부는 돌아온 문익환 목사에게 지령 수수 · 잠입 · 탈출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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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종석 전대협 3기 의장이 1989년 6월 임수경씨가 남한 학생 대표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방북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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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에는 ‘동의대 사태’가 발생했다. 5월 1일 시위 도중 연행된 학생을 구출하려고 학생들이 부산진경찰서 가야3파출소로 몰려갔을 때 경찰이 공포탄을 발사하면서 이 사건이 터졌다. 이 사태는 이틀 뒤 총기 발사 경찰관의 문책과 연행 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300여 명의 학생과 경찰이 서로 충돌, 그 과정에서 경찰관 7명이 불에 타 숨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화염병 사용 등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6월 30일에는 임수경(林秀卿) 양(당시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4년)이 전대협(全大協)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제13대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 양은 한 달 반가량 북한에 머무르다가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정부는 동행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문규현(文奎鉉) 신부와 함께 그녀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으며, 그들은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1년 이상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청문회는 그해 12월 31일 백담사에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 나와 증언함으로써 종료됐다.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던 전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은 당초 계획 13시간에서 2시간으로 단축돼 서둘러 끝났고, 한밤중 국회를 떠나는 전두환 씨의 차 뒤에서 야당 의원들과 보좌관들이 “전두환 잡아라” 하면서 쫓아가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해가 바뀐 1990년 1월 3일, 노 대통령은 5공 청산을 공식 선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