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1990년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3당 합당’ 이었다. 야당의 공세에 2년여 동안 시달인 노 대통령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1월 11일부터 13일까지 3김 총재와 연쇄 접촉한 뒤 나온 결론은 국민들에겐 의외였다.
1월 22일 아침 뉴스에서 민주정의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다고 발표했을 때 국민들은 모두 놀랐다. 그간 서로 싸우는 것만 보아온 국민들로서는 여야가 갑자기 손을 잡고 합당한 데 대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3당 합당은 최선은 아니나 나라를 위해서는 정국 안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차선일 수 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밀실 야합이라는 평민당과 민주당 잔류 세력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탄생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은, 그러나 각 계파간의 갈등을 고스란히 안고 출발했다. 특히 김영삼 씨를 필두로 하는 민주계는 차기 대권 후보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노심(盧心)은 민주계의 생각과는 달리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렇게 정국은 어수선했지만 노 대통령은 중간평가 때와 같이 재임 중 정계 원로들을 가끔 청와대로 불러 모임을 갖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노 대통령에게 스스럼없이 직언을 하며 나랏일을 걱정했다. 1991년 3당 합당 이후 터진 내각제 각서 유출 파동 때는 내각제에 연연하지 말도록 충고했으며, 명지대 강경대(姜慶大) 군이 시위 중 사망한 사건 때는 노재봉(盧在鳳) 총리의 사퇴를 건의하기도 했다.
이렇듯 어수선한 정국이 흐르면서 내가 다시 정치에 나서게 된 것은, 14대 총선을 반년 정도 앞둔 1991년 9월 김대중 씨의 평민당과 이기택(李基澤) 씨의 민주당이 합당한다는 발표가 있을 후였다.
어느 날 손주환(孫株煥) 청와대 정무수석(전 서울신문사장)이 찾아와 삼청동 골목집 식당에서 만났다.
“노 대통령께서 3당 합당을 계기로 14대 국회에 이 총재님을 민자당 전국구로 모시고자 하기에 말씀을 전합니다.”
그때 나는 잠시 생각한 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즉석에서 수락했다. 사실 13대 총선에서 떨어지고 난 뒤 나는 금권 선거와 지역감정 선거에 진저리가 나 있던 상태였다. 이런 왜곡된 선거 풍토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역구 출마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3당 합당의 불가피성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던 터라 노 대통령의 제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나에게 새로운 정당을 함께 창당하자는 제의가 있었다. 1991년 12월과 1992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정주영 회장의 요청으로 나는 그와 자리를 함께 한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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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제의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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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날 때는 강원도 출신 신민선(辛敏善) 전 의원을, 그리고 두 번째 만날 때는 전 노동부 차관이며 통일국민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이용준(李龍俊) 씨를 대동했다. 두 번 모두 만난 장소는 롯데호텔 일식당 ‘벤케이’[弁慶]였다.
정주영 회장은 통일국민당을 만들어 새로운 정치를 펼쳐보겠다며 자기와 함께 손잡고 당을 이끌어가자고 나에게 제의했다. 이때 정주영 회장은 통일 국민당을 만들어 스스로가 대통령 선거에 나설 뜻을 비쳤다.
그러나 나는 이를 거절하였으며 그에게 분명히 이야기했다.
“기업하는 분이 정치를 하게 되면 두 가지 다 망하는 법입니다. 정치적 야심을 버리고 기업에만 전념하시지요. 그것이 정 회장을 위하는 길입니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곧이어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이 있었다. 그러나 민자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선거 이틀 전 서울 강남을 선거구에서 안기부가 야당 홍사덕(洪思德) 후보의 여자 문제와 관련한 전단을 만들어 뿌린 게 악재로 작용, 전국적으로 양향을 준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4년 만에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다.
총선에서 패배하자 민자당은 그 책임론과 함께 대통령 후보 선출 문제로 혼란에 빠졌다. 총선 3일 뒤인 3월 27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는 회동을 갖고 5월 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이젠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에 빠져버렸다. 이종찬 씨와 박태준朴泰俊 씨도 대통령 후보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었고, 노 대통령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상태였다.
이러한 때인 4월 8일 노 대통령은 극비리에 나를 청와대로 불렀다. 노 대통령이 나를 급히 부른 것은 대통령 후보 문제로 고민하던 끝에 나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당시 3·24 총선에서 패배한 민자당 내부는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민정계는 총선에서 과반수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책임을 김영삼 대표가 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번 기회에 김영삼 대표를 제거하려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었다. 또한 김종필 최고위원도 선거 결과에 대한 불만으로 청구동 자택에서 칩거에 들어간 상태였다.
아무튼 이런 상황을 눈치 챈 김영삼 대표는 며칠 뒤인 28일 오전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 출마할 것을 전격 선언, 국면 전환을 모색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에 대로했다.
“당신 마음대로 출마를 선언했으니 마음대로 해보시오. 나는 절대 경선에 개입하지 않겠소.”
바로 그날 오찬을 겸해 가진 노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 간의 회동에서 노 대통령이 이렇게 불쾌해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