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박준규, 유학성(兪學聖), 노재봉 씨 등 여권 중진들과 각각 협의했으나 자신의 의중은 전혀 밝히지 않아 소위 말하는 ‘노심’이 제 3의 인물을 원한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김영삼 대표는 극히 불리한 입장이었다.
이런 가운데 1992년 4월 8일과 9일에 걸쳐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대표와 김종필 최고위원, 그리고 나와 연쇄 접촉을 갖게 됐다. 8일 오후 6시에는 김종필 최고위원과 만찬 회동이 예정돼 있었으며, 그 바로 2시간 반 전인 3시 30분에 노대통령이 나를 급히 찾아 청와대 집무실에서 만났던 것이다.
그날 노 대통령은 의자에 앉자마자 김영삼 대표에 대한 불편한 심기부터 드러냈다.
“혹시 오늘《중앙일보》에 난 유승삼(劉承三) 논설위원의 글을 읽어보았습니까?”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러자 노 대통령은 일부러 일어나 책상 위의 신문을 내게 집어주며 말을 이었다.
“한번 읽어보시지요.”
그 칼럼의 제목은 ‘김영삼 대표의 숙제’였다. 그리고 김 대표는 야당 투사식의 정치가 아니라, 국가 관리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얘기가 그 글의 주요 내용이었다. 또한 ‘경제’를 ‘겡제’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것 더 이상 애교로 봐줄 수도 없지 않느냐는 내용도 있었다.
“여기 있듯이 김 대표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소. 새로운 사람을 내세워야 김대중 씨를 이길 수 있을 것이요.”라고 노 대통령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김영삼 대표가 후보가 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김대중 씨를 상대하기 위해선 김영삼 대표 이외에 대안은 없다고 생각했다. 영남 표를 한데 묶을 수 있는 데다 비영남권에서도 김영삼 대표의 인기가 다른 민자당 예비 후보들보다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김영삼 대표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경제’를 ‘겡제’로 발음하는 것은 거제도 사투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내가 듣기로는 김대중 씨도 새로운 사람이 나오는 걸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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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대통령 후보로 YS 외엔 대안이 없다고 설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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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노 대통령의 마음은 이미 김영삼 대표로부터 많이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새로운 사람이 나온다고 해도 부산 출신 국회의원이나 부산 사람들이 그 사람을 훌륭한 후보라며 흔쾌히 지지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부산·경남 표가 달아나고, 대구·경북 표도 절반은 도망가게 됩니다. 500만 표가 달아납니다. 그렇게 되면 결코 이기기 힘들 것입니다.”
노 대통령은 또한 김영삼 대표가 자기에게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대권 출마를 선언한 것을 몹시 불쾌해했다.
“김 대표 그 사람,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출마 선언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화가 나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를 질렀지요.”
의외로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침착하게 노 대통령을 계속 설득했다.
“그건 꼭 그렇게만 볼 문제는 아닙니다. 대통령도 기자회견을 해보셨지만, 기자들이 ‘이종찬 의원이 출마한다는데 김 대표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데 ‘잠깐 기다리시오. 대통령하고 전화한 뒤 조금 있다가 대답해 주겠소.’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아마 내가 그런 질문을 받았더라도 같은 대답을 했을 겁니다.”
그래도 노 대통령은 무척 섭섭했던 듯 계속해서 불만을 털어놓았다.
“또 김 대표는 기자들에게 경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는데,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 있겠소?”
“그건 김 대표의 성격이 솔직해서 그렇습니다. 김 대표는 실제로 경선에서 지면 탈당할 것으로 마음먹고 있기에, 차마 그대로는 얘기할 수 없어 ‘진다는 것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겁니다. 오히려 솔직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도 노 대통령은 얼굴을 풀지 않고 계속 불만을 표시했다.
“또 총선에 패배한 책임은 모두 행정부에 있다며 나한테 뒤집어씌우는데 문제도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 총선 결과가 나쁘게 나오니까 민정계가 모두 덤벼들어 자신에게 책임을 씌우려고 하기 때문에 다급해서 그런 것이지, 결코 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그런 건 아닐 것입니다.”
내가 계속 두둔하자, 그제서야 노 대통령은 화가 풀리는 듯 다소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아무튼 섭섭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김 대표는 비록 고집은 세지만 약속은 지키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말로만 그렇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약속을 지킨다는 공약을 해야지. 이만섭 총재께서 김 대표를 만나면 잘 충고해 주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