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나는 그날 밤 노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을 알려주려고 카폰으로 김영삼 대표에게 연락을 취했다.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 지금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표는 그날 몹시 바빴다.
“사실 지금 급한 약속이 있어 오늘은 어려우니 내일 만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날 김 대표의 급한 약속이란 바로 김종필 최고위원과 하얏트호텔에서의 만남이었다.
그래서 나는 “좋습니다. 정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만나지요. 그러나 노 대통령과 주례 회동을 하기 전에 나와 꼭 만나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알았습니다.”
다음 날인 9일 오전 11시 결국 우리는 63빌딩에서 만났다. 김영삼 대표와 노 대통령의 회동은 그날 저녁으로 잡혀 있었다. 나는 바로 전날의 회동 결과부터 얘기했다.
“노 대통령의 마음이 이제 거의 70~80%는 김 대표에게 기울어졌소. 아마 오늘 노 대통령을 만나서 잘하면 최종 결론이 나올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김영삼 대표의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이날 나와 김 대표의 만남은 연합뉴스의 조복래(趙福來) 기자가 취재하고 있었다. 나는 노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일을 그르치지 말라는 의미에서 상세하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오늘 완전히 결론을 내리려면 노 대통령이 여러 가지로 섭섭해 하고 있는 것을 풀어주고, 또 노 대통령을 안심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니 되도록 노 대통령의 퇴임 후 문제에 대해 분명한 약속을 해 주시지요. 아무튼 안심시켜 주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결국 내 얘기를 먼저 듣고 그날 오후 4시 청와대로 들어간 김 대표는 노 대통령과 단독 회동을 갖고 최종 결론을 내렸으나, 발표는 얼버무리기로 했다. 청와대 측에서는 주례 회동 결과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발표했다.
“김 대표가 경선 결과에 승복하기로 했다.”
바로 이 얘기는 김영삼 대표가 확실한 믿음을 갖고 경선에 임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청와대의 발표를 듣고는 결과가 만족스러웠음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날 밤 청와대에서 나온 뒤 김영삼 대표는 롯데호텔에서 박태준 최고 위원을 만나 청와대 분위기를 전한 다음 박태준 최고위원의 협조를 요청했다.
“노 대통령은 박 최고위원의 경선 출마를 원치 않으니 나를 지지해 주시오.”
“그럴 리가 없소. 나는 경선에 나설 것이오.”
노심이 돌아선 것을 모르고 있던 박태준 최고위원은 김영삼 대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심야 회담은 결렬됐고, 그 후 김 대표가 다시 광양제철소로 박 최고위원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으나 별 성과 없이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결국 박태준 씨는 외유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10일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완전한 김영삼 체제가 확립돼 갔다.
바로 ‘김영삼 추대위’가 구성되는 한편, 여권 핵심부도 김영삼 대표지지로 정리되어 갔다. 노 대통령은 당시 이상연(李相淵) 안기부장을 박태준 최고 위원에게 보내 경선 출마 포기를 설득했고, 박 최고위원도 마침내 출마를 포기했다. 이후 김영삼 대표와 이종찬 의원 간의 제한 경선 시비도 있었으나,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김 대표가 여권 후보로 최종 확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노심이 김영삼 대표 쪽으로 기울어진 뒤 우여곡절 끝에 1992년 5월 19일 전당대회가 열려 66%의 득표율로 김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그리곤 그날부터 정국은 바야흐로 대선 정국으로 돌입했다. 역시 김대중 씨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섰고, 현대그룹 회장인 정주영 씨도 ‘통일국민당’을 만들어 대권에 도전했다.
9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이 선거의 공정성을 위해 민자당을 탈당함으로써 대권 경쟁은 더욱 뜨거워졌다. 노 대통령이 탈당한 것은 그의 사돈 회사인 선경에 이동통신 사업을 맡긴 것을 김영삼 후보가 반대한 데다, 또한 김 후보 스스로 중립내각의 구성을 주장하면서 남북협상 차 이북에 가 있는 정원식(鄭元植) 총리의 경질을 주장한 데 대해 대통령이 격노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사실 그 당시 노 대통령의 속마음은 자신이 속한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보다 상대당인 김대중 후보에게 마음이 오히려 기울어져 있었던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