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이 김영삼 대표를 불러 탈당을 통고한 그날은 여의도 63빌딩에서 민자당 소속 국회의원 및 중앙위원 천주교 신도들의 모임이 있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필승 결의를 다지는 만찬 모임이었다.
이날 오후 김영삼 대표는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으로부터 탈당 통고를 받고 곧장 그 모임에 달려왔다. 회의장에 들어선 김 대표는 바로 내 옆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뭔가 큰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앉자마자 내게 “노 대통령이 조금 전에 민자당을 탈당하기로 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노 대통령의 갑작스런 탈당소식을 접하고 선거에 미칠 영향을 염려하여 김 대표에서 “그래요, 그게 참 걱정이네요”하고 말했더니 김 대표는 오히려 특유의 결연한 표정으로 “걱정할 것 없어요. 차라리 잘되었어요”하고 말했다. 그의 어투에는 비장한 각오가 베어 있었다. 노 대통령의 탈당이 YS특위의 오기를 불러일으킨 듯했다.
그래서 그때 나는 YS가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기어이 해내겠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김 대표는 이날 만찬 모임에서 노 대통령의 탈당 사실을 밝히고 “노 대통령에게 평당원으로 당에 남아줄 것을 간곡히 권유했지만 그것마저 뿌리쳤다”면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번 대선에서 기어이 승리해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하여 노 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한데 이어 바로 현승종(玄勝鍾) 중립내각이 출범했다.
나는 대선 과정에서 당인(黨人)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처음에 나는 지원 우세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주영 바람이 세차게 전국을 강타하던 어느 날, 민자당의 김영구(金榮龜) 선거 대책본부장과 최병렬(崔秉烈) 선거기획위원장이 나를 찾아 당사에서 만났다.
“의외로 정주영 바람이 셉니다. 이 고문께서 김영삼 후보와 함께 대도시 유세에 나서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이야기인데, 그러나 김 후보 자신이 나를 원하는지 어떤 지부터 알아야 할 게 아니오.”
다음 날 바로 연락이 왔다. 김영삼 후보가 “그렇게 해준다면 고맙기 이를 데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대통령 후보 유세반에 합류, 원주를 시작으로 춘천 · 인천 · 대전 · 울산 · 부산 · 대구까지 대도시 지원 유세에 나섰다.
사실 유세 초반엔 정주영 바람이 대단했다. 경제를 가장 많이 안다는 ‘경제 대통령’을 내세운 데다, ‘아파트를 반값에 공급한다’는 공약이 당시 집이 없던 서민층에 깊숙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나는 유세가 없을 때는 틈틈이 대구에 내려가 흐름을 지켜보았는데, 그쪽에서도 정주영 바람이 만만치 않게 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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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대 대선 초반 정주영 후보가 경제대통령을 내세워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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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인천 유세를 할 때쯤부터 서서히 정주영 바람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마침 현대 계열사 여자 경리직원이 현대그룹의 회사 돈이 선거자금으로 유입된 것을 교회 목사에게 양심선언하면서부터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천 다음은 대전이었다. 나는 대전 유세에서 그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대전역 광장에서 열린 그날 유세는 겨울비가 많이 내렸음에도 열기가 식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정주영 바람이 이제는 수그러들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12월 10일의 부산 유세 때는 더욱 확연하게 느꼈다. 물론 그것은 김영삼 후보의 아성이기도 하지만 김영삼 후보지지 열기는 대단했고, 정주영 바람은 의외로 약했다.
문제는 “박정희 · 전두환 · 노태우‘등 3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던 대구 · 경북이었다. 대구 · 경북은 당시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를 내놓지 않았다. 때문에 의외로 정주영 씨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12월 12일 우리 당의 대구 유세는 그러한 점을 감안,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대결 전장이었다. 대구 서성천변에는 무려 100만 명의 군중이 운집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아직도 마음속으로 찍어야 할 후보를 정하지 못한 이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박상 연단에 올라가 열변을 토하니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러분이 정주영 씨를 찍는다면 그 표는 사표(死票)가 됩니다. 그러니 표를 버리지 말고 김영삼 씨를 밀어 주십시오……”
내 연설이 끝나자 우렁찬 박수와 함께 ‘김영삼! 김영삼!’ 하는 연호가 길게 이어졌다. 나는 우왕좌왕하던 부동층이 김영삼 후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청중들의 뜨거운 열기를 본 나는 그날 밤 어머니가 계시는 대구 집으로 돌아와 승리를 확신했다.
‘분명히 이긴다. 이번 선거에서는 김영삼 후보가 적어도 100만 표 이상으로 이긴다. 왜냐하면 대구 · 경북 표가 한 곳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판에 터진 ‘부산 복집’ 사건으로 잠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를 엄청난 악재로 생각하고 크게 놀란 김영삼 후보는 선거 바로 전날 예정에도 없던 경기도 의왕시 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그날 유세는 마지막일 뿐 아니라 워낙 중요한 일전(一戰)이라 나는 목이 터져라 외쳤고, 내 뒤를 이어 김영삼 후보가 열변을 토했다. 김 후보는 ‘부산 복집’ 사건은 모 기관의 정치공작이라고 몰아붙였다. 연설이 끝난 뒤 김 후보는 의왕시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까지 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명동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을 나눠주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