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유세를 마친 뒤 돌아와 ‘부산 복집’ 의 대화 내용을 신문을 통해 자세히 읽어본 나는 달리 해석했다.
‘대화 내용을 보니 오히려 영남에서는 표가 올라간다. 기타 지역에서 표가 깎인다고 해도 영남 표가 똘똘 뭉치게 되니, 최악의 경우를 계산해 봐도 약간 손해는 볼지언정 큰 손해는 결코 없다.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며, 따라서 승리하는 데는 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결국 12월 18일 선거 결과는 내 예상대로 김영삼 씨의 압승이었다. 영남권에서 80%에 이르는 지지를 받는 김영삼 후보가 997만여 표를 얻어 당선되었으며, 김대중 후보는 호남에서 물표를 받았지만 804만여 표를 얻는 데 그쳤다.
개표 때 나는 당사에서 당원들과 함께 TV로 개표 진행 상황을 지켜보다가 처음 시작하는 것만 보곤 혼자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개표 상황을 보니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최소한 100만 표 이상 이긴다.’
나는 확신을 하곤 자리를 일어섰던 것이다. 그러자 선거본부 직원들이 말했다.
“좀 계시다가 당선이 확정되면 김영삼 당선자가 오실 텐데 만나보고 가시죠.”
그러나 나는 “선거에 승리하면 됐지 일부러 기다려 만날 것까지는 없어요”하면서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나는 김대중 씨가 진 이유는 호남의 선거인 수가 영남에 비해 적은 탓도 있지만, 선거 전략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부드러운 남자’ ‘중도우파’를 부르짖었지만, 나중에 진보 쪽의 표가 달아난다는 얘기가 나오자 마지막엔 ‘전대협과 정책 제휴’를 하겠다고 돌아서는 등 중도와 진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 결국 양쪽 표를 다 놓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는 지적이 많았다.
당시 나는 선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결국 기호 순서대로 결정이 날 것으로 확신했다. 당시 기호 1번은 김영삼, 2번은 김대중, 3번은 정주영이었다. 일본의 어느 정치인은 정권을 잡기 위한 요건으로 ‘둔鈍 · 전錢 · 근根’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즉 머리가 둔해야 하며, 돈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밀어붙이는 근성과 집념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나는 그 당시 두 김 씨를 볼 때마다 이 이야기를 생각하곤 했다.
아무튼 김영삼 후보는 내가 예상한 대로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3년 2월 25일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우리나리에서 내가 창안한 ‘문민정부’라는 단어를 처음 쓰는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그날 김영삼 대통령은 국회에서 취임선서를 함으로써 30년 만에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것이다.
‘문민’이란 이름에 걸맞게 김영삼 정부의 출범은 단순한 정권교체를 뛰어넘는 한 시대의 전환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신한국 창조’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러나 그 신한국을 창조하는 길목에는 많은 진통이 뒤따랐다.
‘내 임기 중 정치자금을 일절 받지 않겠으며 재산을 공개하겠다.’
3월 5일 대통령의 이러한 개혁 의지가 밝혀지면서 정치권에 대지진이 터진 것이다. 3월 30일 민자당 당직자의 재산이 공개되자 박준규 당시 국회의장, 김재순 전 국회의장, 유학성(兪學聖) · 김문기(金文起) · 임춘원(林春元) 의원 등이 의원직을 사퇴하게 됐다.
이렇게 나라가 뒤숭숭할 때 나는 4월 1일 박준규 의장 후임으로 새 국회의장에 내정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회의장은 다수당인 여당 총재인 대통령이 미리 내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날 의장 내정 소식은 청와대 주례 회동을 마친 김종필 당대표가 청와대를 나오면서 카폰으로 내게 연락을 해줘 처음 알게 됐다.
“대통령께서 의장으로 수고해 달라고 하셨소. 나는 지금 당에 가서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나는 기쁨보다 고민이 앞섰다. 재산 공개와 사정으로 동료 의원들이 무더기로 정계를 떠나고 있는데, 나만이 반사이득을 보는 것 같아 못내 착잡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곧 기자들이 몰려올 걸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마음을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정치 생활 30년의 6선 의원으로서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새로운 국회상 정립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쳐야겠다’ 고 결심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간 보아온 헌정사의 부끄러운 모습은 절대로 다시 국민들에게 보이지 않기로 했다.
‘단 하루를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의장으로 새로운 국회의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자.’
이렇게 다짐을 하고 있을 때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나는 조심스럽게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소감은?”
“동료 의원들이 정치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시점이라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 책임이 무겁다.”
“국회 운영의 복안은?”
“실추된 국회의 권위를 다시 살리고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국회상을 정립하는데 밑거름이 될 생각이다. 앞으로 국회는 여야가 대화와 협상을 통해 참다운 민의를 펼칠 수 있는 전당이 되도록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