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기자회견서‘날치기 없애겠...

이때 한 기자가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오랜 정치 생황을 하면서 우리 국회가 꼭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여당도 해보고 야당도 해보았으니 양쪽 입장을 다 잘 안다. 솔직히 말해 꼭 없애야겠다고 생각해 온 것은 바로 국회의 날치기다.”

바로 내 입에서 “날치기를 없애겠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는 나로서는 뼈에 사무쳤기에 나온 말이었다. 31세에 제6대 국회에 들어와 그때까지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날치기’는 바로 우리 국회와 정치의 어두운 표상이었다. 아니, 더 앞서 기자 시절부터 나는 도덕성 없는 정부가 국민을 무시하며 날치기를 하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다. 그러니 ‘날치기’는 나로서는 40여 년간 봐온 반드시 고쳐야 할 고질병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날치기 없는 국회, 대화를 통한 정치’는 비단 나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의 비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날치기를 없애겠다”는 내 결의 때문인지(?), 향후 14개월간의 국회의장 생활은 가시밭길 이었다. 박준규 전 의장의 사퇴서 처리, 이동근(李東根) 의원 문제 등으로 진통 끝에 속개된 4월 27일 본회의 국회의장 보궐선거에서 재석 의원 269명 중 217표를 얻어 무난히 의장에 당선됐다. 언론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입법부의 수장이 된 것이다.

취임사를 통해 내 생각을 그대로 밝혔다.

“문민시대가 창출해야 하는 개혁의 당위성은 시대적 소명으로 다가와 있으나, 그 변화와 개혁을 주도해야 할 우리 국회의 위상이 그 어너 때보다 작은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음은 심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심기일전해 진정 우리 국회가 국민 여망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민의의 전당’이 되고, 나아가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개혁의 산실’로 만듭시다……. 이를 위해서는 힘의 논리나 소수의 무조건 반대 논리를 지양해야 하며, 항상 대화와 타협을 통해 ‘변칙 없는 국회’를 운영함으로써 새로운 ‘민주 국회상’을 확립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지적한‘변칙 없는 국회’란 바로 날치기가 없는 국회를 의미한다. 또한 ‘대화와 타협’은 바로 내 정치 신조이기도 했다.

나는 취임하자마자 이 다짐을 실천했다. 우선 권위주의적인 국회상을 탈피하고 국민과 가까워지는 국회가 될 수 있도록 국회 내에 ‘입법민원실’을 설치했다. 여기서는 국민들의 각종 법률 제정·개정 및 폐지에 관한 의견을 수렵토록 했다. 뿐만 아니라 국회 내에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고자 의원들의 국회 도서관 이용 시간도 연장했음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확대 개방했다.

▲ 1993년 9월 21일 14대 국회의장 당시 / 김영삼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도 다소 호화스럽게 지어진 한남동 새 공관으로 입주하는 것을 사양했다. 솔선수범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솔직히 당시 구 공관은 낡은 데다 도로가 가까워 소음이 심했으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후임 국회의장부터는 신축 공관에 입주했으며, 그 후 구 공관은 의정연수원으로 개조돼 없어졌기 때문에 나도 16대 국회의장 시절에는 한남동 공관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집만이 아니었다. 내게 배당된 2대의 차 중 외제 벤츠를 사양, 반납하고 국산차인 포텐샤를 타고 다니기로 했다. 경호도 외국의 국가원수가 왔다거나 하는 국가적인 행사 이외에는 경호차의 수행도 금지시켰다. 내 의장 시절 이후부터 국회의장실의 외제차는 영원히 사라졌다.

한마디로 나부터 솔선수범함으로써 ‘국민에게 다가가는 새로운 국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나는 국회의장에 취임하면서 “날치기를 절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처음부터 “청와대의 눈치를 보는 일도 하지 않겠다”고 대내외적으로 천명했다. 그것은 국회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진정한 입법부로 자리 잡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알다시피 과거의 국회는 청와대에서 명령만 내리면 일사분란하게 악법도 만들고, 사람도 가두고, 야당 총재까지도 날치기로 제명시킨 바 있다. 그리고 그때 국회의장이란 ‘국민의 국회의장’이 아닌 ‘여당의 국회 의장’으로서, 정부의 충실한 ‘통법부(通法府)의 수장(首長)’일 뿐이었다.

이렇듯 그간 굴절된 국회의장상(像)을 공정하고 중립적인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첫 번째 사건은 1993년 7월 3일의 본회의 사회를 보던 때였다. 당시 제161회 임시국회 대정부 질문에 앞서 의사 진행 발언을 신청한 민주당의 박계동(朴啓東) 의원은 황인성(黃寅性) 당시 총리에게 12·12사태의 역사적 해석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황인성 총리는 지난 5월 13일 국회 행정위에서 야당 의원으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은 바 있었다. 그리고 그때 황인성 총리의 답변은 이러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빚어진 군사 행위였지만, 위법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황인성 총리의 답변이 있은 며칠 후 김영삼 대통령이 다소 다른 해석을 내린 것이다.

“12·12는 쿠데타적인 사건이다.”

박계동 의원으로서는 황 총리와 김 대통령의 해석이 다르니, 황 총리의 생각이 아직도 5월의 행자위 질문 때와 같은가 하는 의미에서 던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