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계기로 나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국회의장상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처럼 여당만 감싸는 의장이 아닌, 여야 모두를 생각하는 ‘중립 의장’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그러나 여당으로선 그 일에 대해 무척 당혹스러워했던 모양이었다.
며칠 뒤 월요일 아침 의장실로 여당의 김영구 총무가 인사를 하러 왔었다. 나는 의례적인 아침인사로만 알고 몇 마디 나누었다. 그런데 잠시 후 의장실로 들어온 출입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바로 민자당 당직자 회의에서 보낸 항의 방문이라는 것이었다.
답답하고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정한 국회 운영을 통해 새로운 국회상을 확립하려 노력하고 있는 내게 격려는커녕 항의라니 한심한 생각까지 들었다. 때문에 나는 이를 확인하러 온 기자들에게 다시 한 번 입장을 분명하게 했다.
“국회의장이 여당의 눈치나 살피는 것 그 자체가 개혁 대상이며, 이제 여당도 자기 마음대로 국회를 운영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아무튼 나는 이번 일에 개의치 않고 아무리 외롭고 고달프더라도 정파에 관계없이 올바른 국회상을 정립하겠다.”
그 일 이후로 나는 많은 어려움과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그러나 결코 ‘새로운 국회상’을 만들려는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24일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에서 국회 본회의장을 현장 조사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야당이 낸 1990년 날치기 법안 통과에 대한 헌법 소원과 관련, 당시 날치기가 벌어졌던 현장인 본회의장을 검사해야겠다는 것이었다. 1990년 7월 국회에서는 ‘군조직법 개정안’ 등 26개의 법안이 날치기 처리된 바 있었다.
헌재로부터 통보를 받은 나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의 위상이 이 지경이 됐나 슬프기까지 했다. 물론 모든 책임은 우리 정치인에게 있었다. 그리고 우리 정치인들이 대화와 타협보다 손쉬운 날치기를 택했기에 이런 부끄러운 일까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헌재의 조사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본회의장이 어떤 곳인가.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논의하는 가장 신성한 곳이 아닌가. 그런 신성한 곳을 헌재에서 현장 검증을 한다는 것은 국회의장인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이것이 국회를 경시하는 행위로 비쳐졌다.
물론 지난 시대의 부끄러운 일이 이런 사태를 야기했다는 것은 이해를 하지만, 그렇다고 가장 신성한 곳인 본회의장을 현장 검증하는 것과 같은 선례를 남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또한 당시 국회를 책임지고 있는 나의 책임이자 의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야당의 반발도 만만찮았다. ‘죄 앞에는 성역이 없다’며 강력하게 내 의견에 반대했다. 특히 율사(律士) 출신 의원들은 법이론을 내세워 본회의장 검증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굽히지 않았다.
“국회법상 누구든 국회의장의 허가가 없이는 본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다.”
결국 나는 본회의장 대신 의장접견실에서 자료검증으로 대신한다는데 야당과 절충함으로써, 오욕(汚辱)이 될 뻔한 본회의장 검증을 막을 수 있었다. 나는 그날 의장접견실로 찾아온 조규광(曺圭光) 헌법재판소장 등 헌법재판관들과 기자들 앞에서 내 심경을 밝혔다.
“정치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여러분을 고생 시켜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비록 13대 때의 일이고 그때 나는 국회의원이 아니었지만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이러한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내 임기 중에는 절대 날치기를 하지 않겠다는 소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취임 초 ‘날치기를 않겠다’는 내 소신은 현재의 본회의장 검증 요청 건으로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다.
‘새로운 국회상’을 만들려는 나의 신념은 이뿐만 아니라 국회 사회를 보면서 의사봉을 칠 때도 항상 되새겼다. 의장은 의사봉을 세 번 치게 되어 있는데 나는 의사봉을 칭 때마다 첫 번째는 여당을 보고, 두 번째는 야당을 보고 쳤으며, 마지막은 국민을 보고 ‘국민에게 부끄러움이 없는가’ 나 스스로 확인한 후 의사봉을 쳤던 것이다.
또한 본회의장에 들어갈 때도 항상 눈을 감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는 기도를 드린 후 의장석에 자리를 잡았다. 일종의 ‘국민에 대한 다짐’인 셈이다. 그러나 얼마 뒤 결국 나는 ‘날치기 파동’을 맞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