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출범은 과거의 의혹에 관한 시비를 봇물처럼 터뜨린 계기도 됐다. 그랬기에 1993년 7월 1일부터 열린 제 162회 임시국회는 ‘12·12 사태’, ‘율곡사업’, ‘평화의 댐’ 등 세 가지 사건에 대한 야당의 국정조사 요구로 연일 시끄러웠다.
급기야 감사원은 율곡사업에 관한 군 비리 문제와 평화의 댐에 관한 조사에 착수했으며, 극회에서도 국방위와 건설위가 이들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따졌다. 결국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따라 7월 17일 이종구(李鍾九) · 이상훈(李相薰) · 전 국방부 장관과 한주석(韓周錫) 전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김철우(金鐵宇) 전 해군참모총장 등이 수감되었다.
그러나 여당인 민자당은 여전히 야당의 과거 의혹에 관한 국정조사 요구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결국 국회는 정쟁에만 휘말려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국회의장인 나는 국회가 온통 과거 문제에만 얽매여 소모적인 정쟁만 거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연일 여야의 총무를 의장실로 불러 설득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건이 해결의 실마리를 풀게 된 것은 내가 기자들에게 나의 견해를 확실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이 세 가지 의혹 사건은 여야를 떠나 이번 기회에 반드시 매듭지어야 합니다. 하지만 국회가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겁니다. 때문에 국정조사는 당연히 국회법대로 재적 의원 3분의 1이상의 발의로 발동돼야 하며, 해당 조사위의 구성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국정조사는 반드시 국가의 정책 수립에 도움이 돼야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는 미래 지향적인 차원에서 행해져야 하며, 특히 이 문제를 매듭짓는 데 필요하다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서면 질의 답변도 가능한 것입니다.”
나와 이 같은 견해 표명은 또 다시 민자당을 당혹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지난번 황인성 총리의 답변 문제에 이어 다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처럼 내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서면 질의가 가능하도록 적극적인 중재를 함으로써 7월 19일 문민정부 들어 최초의 국정조사권이 발동됐다. 20일에는 국방위에서 ‘12·12 군사 쿠데타 및 율곡사업 비리’ 문제가, 그리고 건설위에서는 ‘평화의 댐 의혹’에 관한 국정조사가 정식으로 상정되었다. 마침내 8월 30일에는 세 가지 국정조사를 위한 제 164회 임시 국회가 소집돼 10인간의 국정조사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민정부 최초의 국정조사는 8월 12일 전격적으로 발표된 금융실명제 실시와 대구 동을(東乙) 및 춘천 보권선거 실시로 다소 ‘김 빠진 조사’가 됐다. 물론 국회 차원으로서는 최초로 과거 정권의 비리에 대한 국정조사라는 면에서 의의가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 전격실시를 발표했다 (한겨레신문 93. 8.13.) |
|
이러한 가운데 8월 12일 저녁에는 ‘금융실명제’ 실시가 전격 발표됐다. 국가 경제를 운용하는 시스템에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는 실명제 실시는 공식 발표 1시간 전에 박관용(朴寬用) 비서실장이 전화로 나에게 통보를 해왔다. 당시 청와대는 나와 김종필 당대표에게만 1시간 전에 통보한 걸로 알고 있다.
며칠 뒤에는 실명제와 관련해 대통령이 민자당 국회의원 모두를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베풀었다. 그런데 그날 오찬 약 20분 전 관례대로 대통령과 국회의장인 나, 그리고 김종필 당대표가 다른 방에서 간단하게 차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김종필 대표는 연방 실명제에 대해 좋은 말을 했다.
“대통령께서 정말 이번에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역대 정권 누구도 하지 못한 큰일을 하셨습니다. 국민들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 너무 좋은 얘기만 들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내 고향인 대구의 사정을 예로 들며 얘기했다.
“실명제를 실시한 직후 대구에서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전화가 옵니다. 그런데 그들 얘기를 들으면 실명제 실시는 좋지만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갑자기 수표 할인이 되질 않아 부도 위기에 몰려 있다는 항의도 많습니다. 그래서 실명제는 정착돼야 하지만 국회통과 후에도 고칠 건 고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뒤에 있은 의원 오찬 때였다. 의원 오찬 때 대통령은 실명제에 대한 그의 소신을 피력한 뒤 마지막으로 내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제도상의 미비점 등 고칠 게 있으면 고쳐야겠지요.”
그리고 그날 의원 오찬의 마지막 인사말은 김종필 대표가 했다. 다음 날 도하 언론의 가십난을 장식한 그의 발언은 한동안 정가의 화제가 됐다.
“대통령은 홍곡(鴻鵠. 기러기와 고니)이고, 우리는 연작(燕雀. 제비와 참새)일 뿐입니다. 우리 연작들이 어찌 홍곡의 깊은 뜻을 알리요마는, 우리는 그 높은 뜻을 받들어 따라가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