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청와대 오찬을 마치고 국회로 돌아오면서 나는 우울했다. 당대표가 대통령에게 너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건 결코 국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금융실명제는 오랜만에 여야 모두가 지지하는 등 모처럼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국회는 8월 19일 임시국회를 소집, 대통령의 ‘긴급 재정 경제 명령 승인의 건’을 여야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그러나 역시 내가 예상한 대로 실명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개혁하려는 정부의 입장과 기업의 현실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 대구의 중소기업 예를 들었지만, 그동안 만성적인 자금난에 허덕이던 중소기업들은 실명제로 인해 더운 자금줄이 막혀 전국적으로 최악의 부도 상태를 맞게 됐던 것이다. 특히 갑작스런 실명제로 은행 예금이 급격히 줄고 국민들 사이에는 저축보다 ‘쓰고 보자’는 과소비 풍조가 만연했던 게 사실이다.
결국 정부는 내가 대통령에게 조언한 바대로 보완책 마련에 들어갔다. 중소기업의 진성어음을 한국은행이 무제한으로 재할인해 주도록 조치했고, 금융 거래 위축을 막기 위한 ‘금융 거래 활성화 지침’을 시달하는 등 하나하나 보완책을 마련해 갔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는 상당히 미묘하고 조심스러웠다. 이러한 보완책을 오히려 반개혁으로 모는 분위기까지 형성됐던 것이다. 때문에 국회나 정당에서조차 서로 눈치를 보는 형국이었고, 개혁 주도 세력은 이 같은 보완책 얘기가 나올 때마다 ‘기득권 유지 세력들의 반발’로 받ㄷ아들이며 강하게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나는 비판에 인색한 당시 분위기는 결코 나라의 장래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랬기에 9월 10일 열린 정기국회 때 개회사를 통해 이를 짚고 넘어갔다.
“실명제의 성공을 위해선 비판할 게 있으면 과감히 비판해야 하며, 설혹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더라도 그것이 사리사욕이 아닌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국가 장래를 위해 여야 의원들은 정부에 대한 진솔한 건의와 비판을 서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진지한 비판과 보완책의 제시를 꺼리는 현재의 분위기는 실명제의 성공을 위해서도 결코 도움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비판을 원천적으로 배격하는 분위기로서는 상당한 고언(苦言)이었다. 원칙과 중립으로 국회의장직을 수행하던 내게 커다란 벽이 다가온 것은 11월 25일, 1994년도 예산안의 법정 통과 시한인 12월 2일을 겨우 일주일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
|
| ▲ 김영삼 대통령과 김종필 당대표의 회동 / 당시 나는 당대표가 대통령에게 너무 고언을 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
|
그날은 마침 ‘APEC 지도자 회의’ 참석차 9일간의 방미(訪美) 일정을 마치고 대통령이 귀국하던 날이었다. 청와대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대통령께서 의장님과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하시니, 외부에는 알리지 말고 29일 12시까지 들어오시랍니다.”
비서실의 연락을 받은 나는 오찬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국회는 추곡수매가의 정당법 등 이른바 정치 개혁 입법에 대한 여야의 협상이 난항을 보여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간 쌀 개방 불가 입장을 보이던 정부가 방침을 후퇴하는 기미까지 보이고 있었다. 특히 미국 시애들에서 열림 김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의 회담에서 한·미간에 가장 첨예한 문제인 쌀 얘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데 대해 국민들과 농민은 크게 분개하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야당은 호기를 만났다는 듯 ‘쌀 개방 반대와 우루과이라운드 국회 비준 저지를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제네바에 소속 의원들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로 나왔다. 아무튼 여야간 대립은 첨예했다. 이 같은 분위기를 감안한 나는 애당초 예산안의 강행 통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물론 당시 야당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예산안에 다른 정치적인 문제를 연계시키는 등 구태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이유야 어떻든 당시 국회는 문민정부 출범 후 최초의 정기 국회란 점에서 여야 모두 한발씩 양보해 격돌 없이 통과시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사실 당시 정당법을 비롯, 정치관계법 등은 여야 간에 의견이 접근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정치관계법 심의 특위’까지 만들어 구시대의 적폐를 일소시키기 위해 추진한 정당법·통신비밀보호법 등은 거의 합의가 됐고, 관심의 대상이었던 안기부법의 개정도 거의 의견을 근접시켜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거의 유정의 미를 거둘 순간에 쌀 문제로 암초에 부딪힌 격이었다. 나로서는 야당의 입장도 이해하는 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의 타결이 눈앞에 다가오고 쌀 개방 문제가 농민들의 극심한 불만을 야기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여당이 내놓은 추곡수매안은 거의 동결과도 같은 ‘수매가 3% 인상, 수매량 900만 섬’이었으니 농민들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예산안 통과 법정 시한이 다가오는 가운데 김 대통령이 나를 불렀다.
청와대에 들어가기로 잡힌 그날은 공교롭게도 귀국한 김 대통령이 방미 성과를 직접 국회에 보고하겠다고 한 날이었다. 그러나 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없는 상태에서 그날 아침의 국회 본회의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야당은 미리 배포된 대통령의 보고 연설문에 쌀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자 이를 문제 삼아 회의 불참을 주장하는 강경파와 본회의 참석파 사이에 갑론을박을 벌이는 촌극을 빚기까지 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김 대통령은 여당만이 참석한 가운데 연설을 시작했으며, 야당은 연설 도중에 본 회의장에 들어오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김 대통령은 아마 상당히 불쾌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혹시 나와의 점심 약속에 변화가 있는지 알아봤으나 변동이 없다는 전갈이 왔다. 본 회의를 끝내고 청와대로 가기 전 나는 지난 13대 국회 때는 예산안이 법정 기일 내에 통과된 것은 단 한 차례뿐이었고, 세 차례는 시한을 연장해 가며 절충해 12월 중에 통과됐음을 확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