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로 들어간 나는 대통령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물론 대통령이 무엇을 원하는지 예상하고 있었다. 즉 법정 기한 내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예산안을 통과시키라는 얘기일 것이었다. 또한 그 ‘무슨 일’에는 ‘날치기’도 포함됨을 잘 알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대통령이 역시 본론을 꺼냈다.
“이번 예산안은 법정 기일 내에 반드시 통과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기일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지금 여야가 대치하고 있으니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계속 법정 기일 준수를 주장했다.
“그렇지만 헌법에 법정 기일이 명시돼 있는 이상 반드시 이를 지켜야 합니다.”
아마 대통령은 오전에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에 불참한 데 대해 불쾌해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예산 통과의 법정 기일이 범에 명시돼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일 기일 내에 통과되지 않을 경우 이에 대비하는 구제 조항도 헌법에 함께 명시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연내에만 통과시키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법정 기일에서 며칠 늦는 것은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13대 국회에서는 네 번의 회기 중 시한을 지킨 것은 한 차례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세 번은 12월 안에 처리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문제는 그만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나는 13대 국회 일을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구체적으로 설명했으나 대통령은 계속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아픈 곳을 찔렀다.
“대통령께서는 과거 야당 총재 시절 그렇게도 날치기를 반대하셨는데 지금은 왜 강행 통과시키려 하십니까?”라고 반문했다.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 거는 군사정부였지만 지금은 문정부인 만큼 법은 꼭 지켜져야지요”라고 대답했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법정 기일 내 통과가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렇지만 무리하게 강행 통과를 하려다 국회가 파행이 되어선 곤란합니다. 차라리 며칠 늦더라도 야당을 설득하여 협상을 통해 원만하게 통과시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평행선이었다. 나는 기일을 넘기더라도 되도록 ‘원만한 통과’를 원하고 있었고, 대통령은 ‘법정 기일 준수’를 강조할 뿐이었다.
그날 대통령은 점심식사 내내 예산안 통과를 두고 나와 의견이 이렇게 엇갈렸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자리에서 대통령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아무래도 법정 기일 내에 통과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내 소신을 굽히지 않은 채 “지금 계속 여야 협상이 진행되고 있으니, 그때 가서 수시로 국회 상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청와대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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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국회를 방문하고 연설을 끝낸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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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를 나오는 내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왜냐하면 그래도 대통령에게 무리하게 통과시키지 않는 게 좋겠다는 나의 소신을 분명히 말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소신을 굽히지 않아 예산안의 법정 통과가 어려울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 대통령은 다음 날 국무회의에서도 법정 기일 내 통과를 강조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국회 통과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장관들에게도 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예산안은 반드시 법정 기일을 지켜야 합니다.”
나는 대통령이 이와 같이 지나치게 법정 기일 내 통과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 몹시 걱정이 되었다. 아무튼 사태는 심각해졌다. 그 후 11월 20일 대통령과 주례 회동을 마치고 나온 김종필 대표는 즉각 국회 상임위원장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당의 최종 방침을 밝혔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예산안은 법정 기일 내에 통과시켜야 합니다.”
필경 김 대표는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법정 기일 내에 통과시키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내 생각과는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이었다. 김 대표가 당의 방침을 밝히자, 나는 그날 오후 즉시 정시채(丁時采) 농수산위원장과 김중위(金重緯) 예결위원장을 각각 의장실로 불러 내 방침을 설명하며 간곡히 설득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날치기만은 하지 마시오. 당도 욕먹게 되지만, 당신들 개인에게도 정치 생명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오.”
그러나 내 말은 소용없었다. 다음 날인 12월 1일 소집된 민자당 의원 총회에서 김 대표는 ‘예산안 법정 기일 내 강행처리’ 방침을 결정해 상황은 급전직하로 진행돼 버렸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결국 다음 날인 12월 2일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이날 오전 농수산위원회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몸싸움을 하는 가운데 정부의 추곡수매안이 날치기로 처리됐고, 재무위에서는 노인환(盧仁煥) 위원장이 세법 개정안을 기습적으로 통과시킨 후 따라오는 야당 의원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로써 국회는 완전히 여야 대치 국면으로 돌입했다. ‘대화 없는 법정 기일 준수’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예결위원회에서는 김중위 예결위원장 대신 김운환(金沄桓) 간사가 양동작전을 펼친 끝에 결국 날치기로 예산안을 통과시켜 버렸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