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모든 것은 본회의 처리만을 남겨놓게 됐다. 흥분한 야당 의원들은 본회의 날치기를 막기 위해 의원 및 보좌관 총동원령을 내리고 전면전 상태에 돌입했다. 그러나 사실 민자당에선 내게 기대하지 않았다. 농수산위원회의 날치기가 끝난 후 김영구 총무가 날 찾아왔다.
“의장님! 당의 확고한 방침입니다. 강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장님은 원래 날치기를 않겠다고 국민들과 약속하셨으니, 정 사회를 맡지 않으시려면 사회권을 황낙주(黃珞周) 부의장에게 슬그머니 넘겨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이미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왔음을 알겠지만, 그렇다고 사회권을 쉽게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침통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태가 급변하는 사이 잠시 후 야당 의원들이 들이닥쳤다.
‘의장 보호’를 명분으로 의장실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이 들은 동아일보사 후배인 김원기(金元基) · 손세일(孫世一) · 임채정(林采正) 의원과 허경만(許京萬) · 김영배(金令培) · 김명규(金明奎) 의원 등 모두 나와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의원들이었다. 의장실에 들어온 이들은 아예 진(?)을 쳐버렸다.
의장실에서 보호 아닌 보호를 받게 된 나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날치기만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우리 국회가 아직도 이런 모습이어야 하나……. 국회 출입 기자 시절부터 40여 년간 이 국회를 지켜왔지만, 아직도 달라진 게 없단 말인가……. 조금만 양보하고 자기 주장이나 고집을 버리면 충분히 타협이 가능할 텐데, 그걸 못하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특히 그동안 우리 국회가 국민들에게 달리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한편으로 분노까지 치밀었다. 시간이 흐르자 나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날치기로 인해 국회를 다시 20~30년 후퇴시킬 수는 없지만 민자당의 한 조직인으로서 의사봉을 부의장에게 넘겨달라는 여당의 요청마저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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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5월 25일 필리핀 라모스 대통령 국회 방문 시 본회의장을 안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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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국회의 공백을 막기 위해 사회권은 넘기자. 대신 야당에도 이 사실을 정정당당하게 알리고, 모든 책임은 내가 지자.’
이렇게 결심을 한 나는 바로 여당의 김영구, 야당의 김태식(金台植) 총무를 불러 사회권을 황낙주 부의장에게 이양한다고 정식으로 통보했다.
그 후 착잡한 심정으로 의장실에 앉아 있는 내게 김영구 총무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저……, 의장님께서 사회권을 넘긴다는 이양서를 하나 써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한동안 나는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한심하다는 생각에 나는 화를 벌컥 냈다.
“아니 내가 사회권을 넘긴다고 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서류는 또 무슨 서류요?”
말을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나는 곧 강성재9姜聲才) 비서실장과 김지용(金志涌) 보좌간을 불러 사회권 이양서를 쓰는 동시에 의장 사퇴서도 함께 작성토록 지시했다. 비록 내가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결과적으로 날치기가 되면 국민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돌연한 지시에 강성재 실장은 깜짝 놀랐다.
“의장님이 지금 사임을 하시면 오히려 국회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니 정 뜻이 그러시다면 날치기로 처리되는 것을 보신 후 사퇴를 하는 것이 국회의 공백 상태를 막기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사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때문에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다만 언제라도 사퇴할 수 있도록 김지용 보좌관에게 사퇴서를 맡겨놓고, 날치기 통과가 되면 바로 이종률(李鍾律) 사무총장에게 제출토록 지시했다.
사임서
본인은 1993년 12월 ○일 정상적인 국회 운영을 하지 못한 데 대하여 국민 앞에 그 책임을 통감하고 이에 의장직을 사임코자 합니다.
날짜가 언젠가 될지 몰라 날짜만 공란으로 남긴 채 ‘국회의장 이만섭’을 쓰고 그 이름 위에 인감도장을 찍고 나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리고 나는 김지용 보좌관과 함께 기자회견 때 발표한 사퇴 성명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성명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