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특히 야당에서 타협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당시 민주당은 대표와 실세가 따로 있는 실정이어서 계파 간에 손발이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민주당의 협상 대표들끼리도 각기 다른 안을 내 놓고 협상에 임하는 경우까지 발생했었다. 때문에 나는 그 두 계파 사이에서 중재하느라고 고생한 박상천(朴相千) 민주당 간사와 강수림(姜秀淋) 의원을 각각 의장 공관으로 불러 특별히 합의 성사를 당부하기도 했다.
결국 나를 비롯한 양당의 노력에 의해 5일 뒤인 12월 7일 밤늦게 말 많던 예산안을 격돌 없이 표결로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 43조 2500억 원의 새해 예산안과 ‘수매량 1천만 섬, 수매가 5% 인상’ 의 추곡수매안을 표결로 처리했으며, 구시대의 상징이던 안기부법·통신비밀보호법·정당법은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나로서는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었다. 그러나 대타협은 여야가 조금씩 양보하고 존중하면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으며, 이를 계기로 국회는 국민에게 ‘여야 공동의 승리’를 보였던 것이다. 국회가 이와 같이 원만히 풀리자, 연말 청와대에서 있은 대통령 기자간담회에서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국회가 잘됐어.”
내 방법이 옳았다는 얘기 같아서 그 얘기를 전해들은 나는 그제서야 마음이 풀렸다. 타협으로 개혁 입법을 완성한 국회는 타협적인 분위기의 연속으로 다음해인 3월 4일 제166회 임시국회에서는 1년을 넘게 여야 간에 절충해 온 통합선거법·정치자금법·지방자치제법 등 국민의 여망이었던 이른바 정치개혁법도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킬 수 있었다.
국회가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또한 내가 정치인으로 그간 누누이 강조해 온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결국 민주정치의 근본이라는 걸 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여당의 강경파들은 내가 청와대와 여당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모함했지만, 결국 내가 끝까지 인내하면서 야당을 설득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민정부가 큰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안기부법’ 등 정치개혁 입법을 만장일치로 처리할 수 있었던 점을 그들은 간과했던 것이다.
만일 그때 대화와 타협이라는 내 논리가 아니라 그들 강경파가 주장하는 힘의 논리로 밀어붙였다면 안기부법·통합선거법·지방자치제법 등 역사에 남는 정치개혁 입법들은 결코 원만하게 통과되지 못했을 것이다.
1994년 4월 22일에는 이회창 국무총리가 전격 해임되는 사건이 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총리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가 내각의 논의를 거치지 않고 결정되자 총리직 수행에 대해 불만을 품고 사표를 제출했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이를 전격 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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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 대통령과 갈등 끝네 전격 사임한 이회창 총리 (한겨레신문 1994.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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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리는 김 대통령과의 주례 회동에서 “외무부와 국방부 등이 내각에 있는 한 총리를 외교 · 안보 정책에서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불만을 터뜨렸으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이 총리가 총리직을 사임했던 것이다. 당시 총리 사임을 두고 서로가 해임이니, 자진 사임이니 하는 혼선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사상 초유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후임에는 이영덕(李榮德)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이 내정됐는데, 문제는 국회 인준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이미 167회 임시국회가 개회 중이었으나, 상무대(尙武臺) 증인 채택 문제로 여야가 대립하고 있던 때라 인준을 하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시기였다.
이회창 총리가 갑작스레 경질되자, 민주당은 “헌법에 명시된 총리의 권한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요구와 헌법을 지키지 않으려는 현 정권 간의 내부 충돌이다”라면서 호기를 잡은 듯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내가 안타깝게 생각했던 점은 인준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우리나라에는 국무총리 자리가 비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영덕 부총리가 총리로 지명되었기에 사실상 총리의 통일부총리 두 자리 모두가 비게 된 셈이었다. 때문에 나는 국회의장으로서 비록 여야가 대립하고는 있지만 인준 문제만큼은 국가적인 안목으로 접근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당시 야당의 입장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의장으로서 중재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국무총리가 공석이 된지 일주일이 지난 28일은 마침 임시국회 마지막 날이었다. 만일 그날도 인준을 하지 못한다면 국회는 문을 닫고 3일간의 공고 기간을 걸쳐 총리 인준을 위한 국회를 다시 소집해야 하므로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열흘은 총리 없는 대한민국이 돼야 했다.
28일 밤 11시 50분, 회기를 불과 10여 분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물론 이미 상정돼 있는 ‘총리 임명 동의안’은 야당의 의사 진행 방해로 10분이 지나 자정이 되면 회기를 연장하지 않는 한 부득이 다음 회기까지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나는 의장석에서 스스로 결심했다.
“회기를 하루 더 연장하겠습니다.”
순식간에 내가 회기 하루 연장을 선포한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여야는 모두 어리둥절했으나, 야당도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야당은 당시 ‘임명 동의안’과 ‘국정조사 증인 문제’를 연계해 협상을 벌일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면서 속으로는 오히려 좋아했으며, 총리 임명 동의를 하루라도 빨리 받아야 할 여당은 물론 대환영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