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아무리 회기를 연장해도 성과가 없으면 소용없지 않은가. 따라서 나는 야당을 사전에 설득해야 했다.
“총리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문제다. 지금은 남북 총리회담 등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야당이 총리 임명 동의안 처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국민에게 명분이 서지 않는다. 그러니 차라리 본회의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물론 김태식 총무 등 야당 총무단이 겉으로는 선뜻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내 뜻을 이해했다. 당시 야당의 김태식 총무는 나와 소속 정당은 달랐으나 국회를 공정하게 운영하려는 나의 충정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야당의 일부에선 ‘의장의 본회의장 입장을 막자’는 소리도 있었지만, 야당 총무단이 의장실에 몰려왔어도 내가 본회의장에 들어갈 때 “의장님, 들어가지 마시지요”라고 말만 했지 실제로 방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본회의장에는 물론 민자당 의원들만 들어와 있었다. 야당 쪽 의석이 비어 있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은 우울했다. 그러나 총리 자리가 일주일씩이나 비어 있다는 것은 여야를 떠나 국민이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여당 단독 총리 임명 동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앞서 나는 의사봉을 잡고 심각한 목소리로 국민을 향해 말했다.
“일주일이나 국무총리가 공석 중인 데다가 북한의 핵 문제가 심각한 이때, 통일부총리끼지 공석으로 비어 있어 정부가 장기 공백 상태에 빠져 있는 데 대해 나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들에게는 송구스럽지만, 여야 합의가 되지 않는 이상 나라를 위해 부득이 여당만이라도 총리 인준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국민들께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음 날 각 신문들은 ‘결국 반쪽……’ 이라는 사족을 달았지만, 명분이 있었기에 충분히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언론들은 회기 연장이라는 나의 ‘묘수(妙手) 의사봉’이 격돌을 막았다며, 내 중재 솜씨를 칭찬해 주기까지 했다. 사실 최악의 경우 국회를 다시 소집해 단족이라도 통과시킨다는 전략까지 짰던 청와대와 여당은 내가 계획보다 적어도 5일정도 앞당겨 처리해 준 데 대해 고맙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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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9월 3일 방한하여 국회를 방문한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을 맞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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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자 4개월 전 날치기를 거부한 나를 두고 비난했던 여당의 태도가 돌변했다.
“의장님, 감사합니다. 이번에 히트 쳤습니다.”
이한동(李漢東) 총무를 비롯한 총무단은 의장실을 방문, 내게 연방 감사하다면 인사를 했다. 이뿐 아니다. 이틀 뒤인 5월 1일은 법의 날이어서 축사를 하기 위해 내가 세종문화회관에 가 있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 국회 일은 정말 잘 처리하셨습니다.”
이렇듯 나는 날치기는 분명히 거부했지만, 나라를 위해 처리해야 할 일만큼은 야당을 끝까지 설득해 처리해 왔다. 이영덕 총리 임명 동의안이 바로 그런 사례다. 그러나 나의 이런 중립을 지향하는 ‘공정한 의장’은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박준규 전 의장의 잔여임기 1년 2개월을 마치고 전반기 국회의장의 임기가 끝나게 된 것이다.
나는 비록 자리에 연연치는 않았지만 인간적인 욕심으로는 청와대의 눈치를 보지 않는 국회의장상을 완벽하게 만들어놓고 싶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능하면 후반기 의장직을 계속 맞기를 원했고 김영삼 대통령도 그렇게 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던 중 6월 25일 아침, 갑자기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공관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마침 신문에 내가 유임이냐 아니냐로 설왕설래할 때였지만, 그래도 나는 유임될 걸로 믿고 있었기에 박 실장이 일부러 유임 인사차 공관까지 찾아오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 그날 대통령도 참석하는 신라호텔의 ‘6·25 참전 용사를 위한 리셉션’에 나도 나갈 예정이어서 박 실장에게 신라호텔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결국 그날 밤 ‘6·25 참전 용사를 위한 리셉션’이 끝난 후 나와 박관용 실장은 호텔 내 층 바에서 만났다.
“의장님, 죄송합니다. 이번 국회의장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마주 앉자마자 박 실장이 입을 열었다.
“뭐요? 의장이 바뀌다니…….”
“…….”
“대통령께서 날 보고 그대로 하라고 하셨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