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비서실장이 <의장 교체>로...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박 실장에게 되물었다. 박 실장이 거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도 각하께서 의장님과 하신 말씀도 있고 해서 직접 전화도 못하시겠다면서 이렇게 저보고 대신 말씀드려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박 실장이 그렇게 말한 데는 연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루 전인 6월 24일 방한 중이던 추안 리크파이 태국 수상을 위한 청와대 만찬에서의 이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날 만찬에서 나는 대통령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날따라 대통령은 여러 번 나에게 잔을 부딪치기까지 하며 아주 흥겨워했었다. 그리고 만찬이 끝나고 나가면서 내 손을 잡는 대통령에게 터놓고 물어왔다.

“후반기 국회도 제가 계속해서 맡아 하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선뜻 그 자리에서 “아,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그날 밤 김 대통령의 분명한 답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집사람에게 “의장을 그대로 맡기로 했다”는 말을 하기까지 했으니 내가 박 실장의 말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박관용 실장이 “각하께서 의장님과 하신 말씀도 있고 해서 직접 전화도 못하겠다”라고 한 말은 바로 그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솔직히 말을 이었다.

“내가 민주계가 아니라서 바꾼단 말이요?”
“아니, 그게 아닐 겁니다.”

박 실장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도 저는 의장님을 밀었다는 사실만 알아주십시오.”

나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박 실장의 입장은 이해해요. 잘 알겠소.”

그 자리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이유가 없어 나는 일어서서 나왔다. 김 대통령을 너무 믿었던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순진해서인지 그런 의외의 일을 당하자 솔직히 나는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이나 주위에서 “이 의장이 날치기 사회도 거부했고 여당이 사사건건 컨트롤하기가 힘들어 경질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올 때도 나는 이를 개의치 않았었다.

국회의장이 그렇게 청와대와 여당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자리도 아니고, 또 나는 어떠한 음해와 어려움도 무릅쓰고 국회를 이만큼의 위치로 끌어올려 놓지 않았던가. 나는 개혁을 한다는 여당을 위해서난 야당을 위해서나, 그리고 국회와 나라를 위해서 어려운 현안들을 원만하게 풀어온 점을 여당이나 청와대도 속으로는 잘 이해하고 있을 줄로만 생각했다.

▲ 1993년 9월 15일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국회 연설

박 실장과 헤어진 후 차를 타고 공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창에 비치는 장충동의 우거진 여름 숲을 바라보며 착잡한 심경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국회의장이 이렇게 불과 하루 이틀 전에 자신의 거취를 통고받아야 하다니…….’

화려해 보이는 국회의장이라는 자리였지만 실제로는 하루도 밤잠 설치지 않고 자본 적이 드물었던 지난 1년 2개월간의 고뇌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평생 정치를 하며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는, 그리고 이 나라 정치 폐습의 상징인 날치기를 거부했다고…… 이럴 수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불끈 화가 치솟기도 했다.

‘국회의장은 국회의원들이 직접 투표를 해서 선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감권분림의 정신으로 보아서도 입법부의 수장을 대통령이 지명한다느니 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비록 여권의 지명은 받지 못했으나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통해 출마 의사를 밝힐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그 생각을 거두었다. 왜냐하면 만일 지명을 받지 못한 내가 의장에 당선되었을 경우 청죽에 일대파란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시 7월 25일부터 27일까지로 계획되어 있던 김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의 정상회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염려해서였다.

아무튼 그 정도로 착잡했던 나는 일요일 내내 공관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또 지난 1년 2개월 영욕의 시간들을 반추하다가 몇몇 친한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동안 여러 가지로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작별인사를 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이것마저 나중에 “이 의장이 뒤에서 득표 공작을 하는 전화를 했다”는 음해를 받는 결과를 낳게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때 우리 정치가 그 정도 수전밖에 되지 않았다는 데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그때 내가 섭섭했다면, 여당인 민자당이 새로운 의회상을 정립하겠다는 나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집권 후반기에 의장이 대통령의 말을 안 들으면 곤란합니다. 그러니 바꾸시는 게 좋습니다.”

민주계 강경파가 대통령에게 이런 식으로 나를 견제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국민에게 한 점 부끄럼 없이 공명정대하게 국회를 운영해 왔다고 자부하는 나로선 섭섭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 김 대통령도 국회가 여야 극한 대립으로 파국에 직면할 때마다 국회의장을 바꾼데 대해 후회했다는 말을 측근들로부터 듣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