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파 초월한 행적 평가 의장 선거...

아무튼 나는 1994년 6월 28일 1년 2개월의 짧은 임기를 마치고 국회 의장직을 물러났다. 당시 언론과 여론은 원만한 대야 관계, 대국민 이미지, 그리고 대구 수성을 보선을 앞둔 TK 배려 문제 등을 고려해 유임을 점치기도 했으나 결국 계파 우선 원칙(?)에 의해 물러나야만 했다.

많은 사람들은 나의 경질을 아쉬워했지만, 나는 그래도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6월 28일에 있었던 차기 의장 선거에서 나는 여당의 지명을 받지 못했으나 무료 95표라는 많은 지지표를 얻었으며, 이는 의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95표는 야당과 무소속은 물론 여당에서도 당론과 관계없이 나를 많이 지지해 준 결과였다. 1년 2개월간 고독한 투쟁을 해온 나를 의원들이 인정해 준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의장에서 물러난 다음 날 아침 《조선일보》(1994.6.29)는 나의 1년 2개월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여기 우리가 앉아 있는 국회는 어느 정파의 국회가 아니고 대한민국의 국회입니다. 이 나라 의회 민주주의 발전에 벽돌 하나라도 깔았다고 후일 평가해 준다면 더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이만섭 의장은 1년 2개월간의 의장 역을 마감하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자신의 여의도 시대가 민주주의를 향해 벽돌 한 장을 쌓아올린 기간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했다. 작년 4월 몰아친 재산 공개 파동의 회오리 속에서 정치권을 떠난 박준규 당시 국회의장의 뒤를 이은 그는 길지 않았던 재임기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화제와 논란의 씨를 뿌렸다.

그리고 그를 향한 호불호(好不好)의 편갈림이 야호(野好), 여불호(與不好)로 나뉘었다는 게 그의 성향과 국회 운영의 스타일이 어떠했었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야호의 흐름은 그가 의장 자리를 떠나던 날의 후임 국회의장 선출 투표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물론 무기명의 투표이지만 모두가 그의 이름을 적어 넣은 95표를 야당 쪽의 것으로 넘겨짚었고,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야당은지지 발언을 하고 나오기도 했다.

이만섭 스타일은 지난해 그가 15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는 날부터 나타자기 시작했다. 취임 첫마디가 ‘절대 날치기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국회의장의 한국적 한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조금 지나친 포부로 받아들여질 선언이자 다짐이었다.

그가 국회의장을 떠나면서 손에 쥔 정치적 성적표에서 수를 받은 과목은 바로 이 약속을 지켜냈다는 부분일 것이다. 지난해 12월 2일 예산안 처리 마지막 시한 때가 고비였다. 그는 의장직 사퇴서를 써놓고 예산안 날치기를 거부했고, 야권과 일부 국민들로부터 소신 있는 의장이라는 박수를 받은 것이다.

지난해 7월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야당 의원의 12·12 성격 규명에 대한 의사 진행 발언 때, 답변을 주저주저하던 황인성 당시 총리에게 호통을 쳐 답변토록 한 일과 헌법재판소의 날치기 법안 현장 검증을 못하도록 한일(93년 8월), 평화의 댐·율곡사업에 대한 국정조사 문제로 여야가 격돌할 때 전직 대통령의 서면 조사 시사 발언 등도 여야의 그에 대한 눈길이 갈리도록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의 이런 성향과 비조직적인 행동이 개인의 인기 관리에 연연한다는 여권 내의 부정적 평가로 이어졌고, 끝내 연임에 장애가 됐다는 평이지만 스스로는 ‘후회 없다’는 한마디로 의장생활을 자평했다.”

▲ 국회의장 임기를 마치기 전, 1994년 국회를 방문한 고르바초프 구 소련 대통령과 새 국제질서의 전망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이렇게 의장직에서 물러난 지 열흘 후인 7월 8일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김영삼 대통령이 조찬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이 의장,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십시오.”

자리에 앉자 김 대통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나는 김 대통령의 그 말로써 의장직에서 물러난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식사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국회의장직에서 물러난 것도 섭섭했지만, 나에게 ‘그대로 하라’고 안심시켜 놓고 전격적으로 바꾼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여전히 서운한 마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제가 지난번에 날치기 사회를 거부했다고 바꾼 것입니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대통령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대통령은 어색한 웃음을 띠며 “아, 그게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제가 민주계가 아니어서 바꾼 겁니까?”

“뭐, 그런 것도 아니지요.”

대통령은 계속 손을 내저었다.

“아직까지도 민주계니 비민주계니 하는 것을 따져서야 되겠습니까?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을 밀었다면 모두가 YS계지 거기에 민주계, 비민주계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는 그런 계보를 따지는 정치는 없어져야 하질 않겠습니까?”

“아, 물론 그래야겠지요. 이 의장,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대통령이 어색한 표정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으나, 나는 말이 나온 김에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께서도 오랜 경험으로 잘 아시겠지만 국회 운영만은 무리하게 밀어붙여서 될 일이 아니질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박준규 의장의 잔여임기를 맡아 한 것입니다. 동창회나 종친회 회장도 앞사람의 잔여 임기를 맡아 했으면 큰 잘못이 없는 한, 정식으로 임기를 채우도록 하는 것이 일반 사회의 관례입니다.”

“아, 이번에는 의장단과 상임위원장단 등 전반기 국회직 모두를 바꾸기로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대통령이 변명을 했다.

“그것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다 그만둔 것이 아니라 황낙주 부의장은 의장으로 올라가질 않았습니까?”

“아이구, 이제 그 얘기는 그만 합시다. 이 의장은 또 일하실 기회가 있을 테니……. 어서 식사나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