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기미를 감지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표차가 갈수록 벌어지기 시작하자 개표작업을 하던 종사원들이 이상하리만치 느리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날이 새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선거관리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개표종사원들이 피곤하니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표를 중단합니다.”
오후 6시로 시간을 잡은 건 뻔한 수작이었다. 어두워야 뭔가 일을 꾸밀 수 있지 않은가. 눈치를 챈 야당 측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히 항의하자 개표 재개 시간이 오후 4시로 앞당겨졌지만 여전히 양측 사이의 긴장감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오후 4시가 돼도 개표 종사원들은 억지를 부리며 개표를 미루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느니, 또는 쉬어야겠다느니 하면서 미적거리다가 결국 개표는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저녁 7시 10분경에야 속개됐다.
당시 나는 개표장 안팎을 오가며 분위기를 탐색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개표는 바로 옆 교실에 대구 시내에서 주먹 좀 쓴다는 깡패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닌가. 그 우두머리는 당시 대구 사회에서 유명한 자유당 소속 전세덕 경북 도의원이었다.
‘불상사가 나겠구나.’ 나는 직감했다. 개표는 속개됐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투표함을 개봉해 자유당 표와 민주당 표를 분류해 쌓아놓은 것을 보니 한눈에도 민주당 쪽이 훨씬 많았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개표 중 갑자기 전깃불이 나가버렸다. 두어 차례 깜빡깜빡 하더니 세 번째는 아예 끊겨 버렸다. 나는 올게 왔음을 느꼈다. 역시 불이 나가자마자 옆방의 깡패들이 소리를 지르며 개표장으로 난입했다. 그와 동시에 민주당 조재천 대변인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표 도둑이야! 표 도둑이야!” 순간 기자석에 앉아 있던 나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당시 내 나이 스물일곱, 무서울 게 없는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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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일 재선거 취재 때 경찰과 충돌하고 있는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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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도둑놈들아!”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간 나는 민주당 표가 쌓여있는 곳으로 가 양말로 표를 감싸 안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표를 감싸 안고 엎드려 있는 내 몸과 머리 위로 곧이어 깡패들의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오기 시작했고, 나는 평생에 걸쳐 가장 심한 폭행을 당했다.
잠시 후 깡패들이 사라진 뒤 장내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개표소 안으로 들어온 경찰은 엉뚱하게 관람인들과 기자들을 밖으로 내 쫒아버렸다. 나중에 전기가 들어온 뒤에 보니, 역시 쌓여 있던 민주당 지지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림짐작으로 3600여 표가 되는 상당한 분량이었다.
‘도대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서글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주위의 기자들도 참담한지 담배만 피워 물고 있었다. 마침 그때 개표종사원 중 몇 명이 기자들에게 사과를 나누어주었는데, 분이 머리끝까지 치민 나는 사과를 개표소 안으로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야 이 뻔뻔스런 놈들아! 표 도둑놈들아!”
개표 결과는 뻔했다. 자유당의 김익로 후보가 300여 표 차로 재당선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 같은 정의감 앞에는 다시 위험만 도사리고 있었다. 분한 마음을 서울로 올라온 내게 ‘개표 방해’라는 선거법 위반 혐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병옥 박사의 비서관인 조승민 씨로부터 급하게 연락이 와 가보니 조 박사가 내게 귀띔을 해주었다.
“조금 전 이기붕 씨 집에서 자유당 간부회의가 열렸는데, 자네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기로 했다네. 그러니 빨리 피해 며칠 간 숨어 지내게.”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표 도둑놈들은 가만히 놔둔 채, 불의를 참지 못한 내가 사과 던진 걸 가지고 ‘개표 방해 죄‘를 적용하다니. 그러나 구속까지는 되지 않았다. 친구 집, 친척 집으로 피신해있는 동안 <조선일보> 한남 기자 등 동료 기자들이 항의하는 바람에 없었던 일로 됐던 것이다. 당시 깡패들에게 심하게 얻어맞은 것이 지금도 허리에 신경통으로 남아 있다.
한 마디로 내 기자 생활은 이렇듯 민주투사와 같았다. 나이도 젊은데다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성격으로 부정부패가 판치던 자유당 당시 사사건건 정부 당국과 대립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당시 정치부 기자 생활은 너무 바빴다. 대부분 신문사의 정치부에서는 2~3명의 기자가 국회와 정당을 담당했는데 조⁃석간을 모두 발행하던 때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