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민자당 정서 확산 보선 패배 ...

대통령이 그렇게 서둘러 말문을 돌렸고 나는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청와대를 나왔다. 내 문제도 내 문제였지만, 그런 기회에 대통령에게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따졌던 것이다. 집권 초기 높은 지지율만 믿고 모든 일을 무리하게 전격적으로 결정했으며, 또 대화나 협상의 산물이 되어야 할 국회 운영마저 날치기라는 ‘밀어붙이기’를 지시했던 대통령의 정국 운영에 한마디는 분명히 해놓아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 때문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 나온 지 몇 시간 뒤인 12시 뉴스에서 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급보를 들었기에 나는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어쨌든 이와 같은 국회의장 경질은 그 후에 있은 8월 2일의 대구 수성갑, 경주, 영월·평창 등 3개 지역 보궐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대구, 경주의 보선에선 연단에 올라간 야당 후보자들마다 “YS정권이 날치기를 거부한 이만섭 의장을 바꿈으로써 이제 하나 남은 국회의장직까지 TK에서 빼앗아갔다”라며 김영삼 대통령을 신랄히 공격했고, 선거 결과 대구 수성갑에서는 박철언 전 의원의 부인인 신민당의 현경자(玄慶子) 후보가 민자당의 정창화(鄭昌和) 후보에게 큰 표 차이로 압승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알리는 한겨레 신문 기사 (1994. 7.10.)

그리고 민자당은 경주에서도 민주당에게 패배, 전국 3개 지역 중 겨우 강원도 한 곳에서만 이기는 참패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민자당이 8·2 보선에서 참패하자 정국은 불안했고 특히 TK지역은 위기감이 감돌기까지 했다. 당 소속의원들 사이에는 보선 패배에 대한 당 지도부 책임론이 제기되는가 하면, 대구·경북지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여당 간판 무용론’과 ‘신당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었다.

특히 ‘민자당은 싫다’는 TK 유권자들의 민심 이반의 조짐은 보선을 계기로 점차 확산되어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4대 지자제 선거와 1년 반 밖에 남지 않은 15대 청손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러한 TK지역의 반 민자당 정서의 확산도 문제였지만, 총선을 앞둔 정부·여당의 정국 운영 난맥상이 점차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 이었다. 나는 비록 국회의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당의 상임고문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국회의원으로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그때그때 올바른 조언과 충고를 해줌으로써 정부 여당이 바른 길을 가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8·2 보선 결과에 대해서는 “달라진 민심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겸허히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말만 있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행태가 계속된다면 민자당은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까지 했다.

또한 보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주계 중심으로 짜인 시도 지부장, 당무위원 개편에 대해서도 “민주계가 전면으로 포진됐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었다. 이에 나는 “국내외적으로 현안이 산적한 지금 어느 한 계파만을 중심으로 한 국정 운영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전 국민의 총의를 모으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라며 따끔한 고언을 바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부·여당 내의 정책상의 혼선도 빈발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나라 안뿐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던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해 가는 정부의 정책 혼선은 부처 간에 하루가 멀다 하고 다른 말들이 새어나오는 등 외교 난맥상이 두드러지게 노출되었다.

김영삼 대통령 스스로도 직접 “갑작스런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 “지금 북한 전역에 김정일 타도 전단이 살포되고 있다”는 등 근거도 대지 않고 예민한 대북 문제를 불쑥불쑥 거론하는 일이 잦아 이러한 정부 내 혼선을 가중시켰다.

특히 한승주(韓昇洲) 외무장관이 “특별 핵사찰이라는 용어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발언한 데 대해 정종욱(鄭鍾旭)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과민하게 이에 반발하고 나서는 등 관련 부처간의 혼선과 대립은 위험 수위를 오르내렸던 것이다.

나는 이처럼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국무 회무통일위원회를 통해 호되게 질타했다.

“지금은 해방 이후 남북관계가 제일 어려울 때인데 도대체 현 외교·안보팀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인지 걱정이 태산 같다. 아무 설명도 없이 갑자기 북한에서 무슨 사태가 발생이라도 하는 것처럼 국민을 불안하게 해서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갑작스런 통일도 마음속으로만 준비하면 되는 것이지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국민을 혼란케 하고 또한 쓸데없이 북한을 자극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민자당 고문단 회의에서도 나는 “남북 문제나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당정 협조의 미비와 이로 인한 정책의 일관성 결여로 국민의 믿음을 잃게 됐다”며 충고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