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나는 14대 국회의장 재임 중 국회의 권위 제고와 민주적 운영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 정기를 세우는 일에도 많은 관심과 정성을 쏟았다. 그중 특히 보람 있었던 일은 국회 차원에서 백범(白凡) 김구 선생 암살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게 한 일이다.
1992년 11월 5일 백범 김구 선생 시해 진상조사 위원장 이강훈(李康勳)외 24명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 시해 진상 규명’이라는 제목의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는 지지부진했었다. 이런 가운데 내가 의장이 되자 이강훈 광복회 회장, 김구 선생의 자제인 김신(金信) 전 교통부 장관, 서울대 신용하(愼鏞廈) 교수 등이 국회의장실을 방문하여 나에게 진상조사가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나는 법제사법위원외에 관련 청원심사소위원회를 조속히 구성할 것을 강력하게 지시하여 1993년 5월 14일, 강신옥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청원심사소위가 구성되었다.
이후 청원심사소위는 약 2년 반 동안 조사를 펼쳐 국회 차원에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조사 결과 백범 암살 사건은 ‘안두희(安斗熙)에 의한 우발적인 단독 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법사위 청원심사소위는 진상 조사를 통해 안두희는 단순 암살자에 지나지 않고 그 일차적 배후로서 군부의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이후 김창룡(金昌龍)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으며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재판장,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한 것을 밝혀내는 성과를 올린 것이다.
이후에도 나는 왜곡된 한국 현대사를 하루빨리 바로잡아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고 후세들에게도 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해 김구 선생 기념관을 완성하는 일에도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기념관 건립 사업에 정부 차원의 국고 지원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챙기기도 했는데, 김구 선생의 자제이자 기념 사업회 회장인 김신 전 장관은 지금도 나를 만날 때마다 이 일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겨우 3분의 1을 넘어서 1994년 가을부터 일찌감치 문민정부의 위상은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민정부로서의 정통성과 취임 초기의 개혁 드라이브는 점차 빛이 바래져갔고, 권력의 독선 속에 특정 계파와 가신에 의한 정치의 폐단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1994년 10월 21일 한강 한가운데의 성수대교가 붕괴, 어린 중학생들을 비롯한 무고한 시민 32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성수대교의 참사에 이어 충주호 선백 화재, 서울 아현동 가스 폭발,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등 대형 참사가 연이어 발생했고, 이듬해 6울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지 이어져 한국은 ‘사고왕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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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의 성수대교 붕괴사건 호외기사 (1994. 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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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대형 참사로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 정치적으로도 격동을 면치 못했다. 특정 계파 중심의 국정 운영에 대한 비판이 구조되고 있는 가운데 1994년 12월, 민주계 핵심이었던 최형우(崔炯佑)내무장관이 “국민들은 새 인물을 원하고 있다”며 김종필 대표의 2선 퇴진을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그동안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불안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민자당의 내분이 날로 가속화되었다.
결구 이듬해 1995년 1월 19일 김종필 대표가 대표직을 사퇴, 제 갈 길을 가기로 선언했고, 3월 31일 충청권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당 ‘자유민주연합’이 탄생하게 되었다. 민자당의 후임 대표로는 이춘구(李春九) 의원이 지명되었지만, 당 지도부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계 중심의 친정체제만 강화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 무렵 나는 당 안팎의 대구·경북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TK 정당을 만들자는 제의를 숱하게 받았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 이래 부산·경남, 즉 PK라는 용어가 새로 생기고 모든 인사에게 PK가 중용되고 있는데 대한 반감이 그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제의를 거절했다. 아무리 김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식에 불만이 있고 민자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김종필 씨를 중심으로 하는 충청권의 정당이 떨어져 나갔는데 또다시 TK마저 새 당을 만든다면 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호남과 충청, 여기에 경상도마저 TK와 PK로 나뉘어 지역정당이 난립한다면 이 국가 분열에 대한 역사적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그래서 내가 주창한 것이 바로 '당풍 쇄신 운동‘이었다.
민자당은 그해 6·27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했다. 선거 결과 광영단체장 선거에서 민자당 5명, 민주당 4명, 자민련 4명, 무소속 2명이 당선됨으로써 광역지자체의 여소야대가 연출되었고 기초단체장도 민주당 84곳, 민자 71곳, 무소속 52곳, 자민련 27곳으로 주요 대도시의 구청장들은 거의 야당이 다 차지하게 되었다.
6·27 지자체 선거의 특징은 한마디로 또다시 재현된 지역주의와 반민자당의 민심 이반이었다.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본격적으로 선거 유세에 뛰어들었고 자민련 역시 창당 3개월 만에 완전히 충청권을 석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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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 여당인 민자당에 대한 민심이 확연히 돌아섰다는 점이었다. 이 반反 민자당 정서의 본질은 첫째 인사와 정책 결정 과정 등 국정 운영의 능력과 방식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고, 둘째는 집권 민주계의 야당식 통치 행태와 독선적 스타일이 광범위한 불신을 낳았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