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거 후 열린 7월 5일의 당 의원총회에서 당풍 쇄신 운동을 촉구했다.
“이번 선거 패배는 우리가 민심을 제대로 읽는 것을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되었다. 과거에도 여당이 정부의 뒤만 따라다니고 민심을 외면할 때 여소야대가 생기고 정변이 일어났다. 대통령을 무조건 기분 좋게 모시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모두가 일대 당풍 쇄신 운동을 벌여야 한다.”
나의 이러한 당풍 쇄신 운동 제기는 많은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동안 청와대의 독단과 폐쇄적인 당 운영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의원들이 나의 뜻에 공감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둘과 뜻을 모아 본격적으로 서명 운동을 전개했고 ‘당풍 쇄신 운동을 시작하며’라는 건의문에 의원 20여 명의 서명을 받아 8월 10일 한승수(韓昇洙)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당시 건의문의 내용과 7개 항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난 6·27 지방선거를 통해 현 정부와 집권 여당에 대한 국민들의 광범위한 민심 이반을 분명히 목도했다. 6·27 선거를 통하여 국민들은 정부와 여당에 대해 더 이상 믿음과 지지를 보내지 않았고 뼈아픈 자기반성과 국정 운영 방식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뼈를 깎는 자성 아래 새로운 각오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이 국민으로 하여금 이토록 분노케 했고 또 철저히 외면하게 했는지를 분명히 직시하고 새롭게 거듭 태어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정부·여당은 국민 위에 군림하거나 자만해서는 안 되며 항상 국민 앞에 겸손해야 한다.
둘째, 조속한 당정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국민 여망에 따른 책임정치를 구현해야 한다.
셋째, 여당은 언제나 국민의 편에 서서 민심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하여 이를 정책에 반영시켜야 하며, 또한 정부의 잘못을 올바르게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국민을 불안과 근심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과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다섯째, 변화와 개혁은 설득의 과정을 거쳐 국민의 동의와 자발적인 참여 속에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명실 공히 대화합의 정치를 펼쳐야 한다.
여섯째, 개혁 조치 중 국민에게 고통과 불편을 주는 것은 이를 시정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일곱째, 집권 여당은 독선과 분파주의의 늪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기를 되찾아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이제 더 이상 비생산적인 당내 분파는 일소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겸허한 자세로 마지막으로 노력을 한다면 아직도 희망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이번 6·27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을 받들어 이를 우리 당이 새로 태어날 소중한 기회로 삼아 모든 것을 국민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선 민심을 되돌려야 한다. 이에 우리는 뼈를 깎는 자성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당으로 거듭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당풍 쇄신 운동’을 펼쳐나가고자 한다.”
나는 민자당의 위기를 느끼고 이처럼 당풍 쇄신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회 있을 때마다 당의 진로에 대해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당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음해인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15대 국회의원 총선에서도 잘 드러났지만, 당시 내가 특히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그때 민자당이 TK와 PK로 완전히 갈라졌다는 점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시 잘한 것도 많았고, 잘못한 것도 많았지만 나는 가장 큰 잘못이 TK와 PK를 갈라서게 만든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늘 하나로 불렸던 영남이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으로 갈라지게 된 것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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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 정부 시절 정부인사에서 티케이와 피케이 간의 갈등도 있었으나 기실 영남이 독식하는 인사였다(동아일보 1996. 7.2.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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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초기 박준규 국회의장은 재산 공개 파동으로 의장직과 의원직에서 물러났으며 박철언 의원은 부패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군 하나회 숙정 때도 공교롭게도 그 대상이 대부분 대구·경북 출신들이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하나회’를 척결한 것은 이해가 간다고 하나 선배들의 권유로 ‘하나회’ 회원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숙정되는 등 많은 유능한 고급 장교들이 억울하게 당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대구 출신 이종구 국방장관이 율곡사업 비리로 구속되었고 대구사대부고 출신의 한주석 공군, 김종호(金鍾浩) 해군 두 참모총장 역시 인사비리로 구속되었다. 당시 대구에서는 그들이 억울하게 당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개혁과 비리 척결이라는 당위론적 명분은 있었지만 한꺼번에 대구·경북 인사들만 집중적으로 제거됨으로써 대구·경북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는 상대적으로 부산·경남 출신 인사들이 중용됨으로써 대구·경북은 정부·여당에 등을 돌렸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때만 해도 경남·경북의 구분은 전혀 없었다.
박 대통령이 경북 출신이었으나 주요 측근은 오히려 부산·경남 인사가 더 많았던 것이다. 이후락 비서실장은 울산, 박종규 경호 실장은 마산 출신이었으며, 김현옥(金玄玉) 내무, 조시형(趙始衡) 농림부 장관, 양찬우(楊燦宇) 공화당 사무총장과 박영수(朴英秀)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 등 많은 주요 인사들이 부산·경남 출신이었다.
그리고 박 대통령과 특히 가까웠던 대구사범 동기동창생으로서 평소 대통령에게 많은 조언을 하던 서정귀 씨(당시 재계 실력자), 그리고 서울 MBC사장과 부산 MBC 사장을 역임한 조증출(曺增出) 씨, 그리고 《부산일보》사장을 역임한 황용주(黃龍珠) 씨 등도 모두 부산·경남 출신이었던 것이다. 《부산일보》의 황용주 사장은 그 후 필화사건으로 물러났으며 같은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왕학수 씨가 그 뒤를 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