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이러한 가운데 15대 총선의 해인 1996년이 밝았다. 여당으로서는 모든 것이 걸린 총선이었다. 앞서 6·27 지방선거 때 뼈아픈 패배를 겪은 여당으로서는 특히 대구·경북이 문제였다. 어차피 호남과 충청은 지역 대결 구도로 선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대구·경북과 수도권의 표심이 선거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였다.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이름까지 바꾸면서 선거에 임했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신한국당이 과반수는 커녕 100석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왔다.
이러한 가운데 선거를 얼마 앞두고 김 대통령으로부터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대구·경북의 공기가 좋지 않습니다. 이 의장은 전국구를 하시고 선거 때는 대구·경북을 책임지고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김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한편으로 고마웠지만 또 한편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대구에 자주 내려가 대구의 민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의 민심은 이미 여당인 신한국당을 떠나 있었다. 무소속이나 자민련 후보를 찍으면 찍었지 여당 후보는 어림도 없다는 게 대구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당시 대구의 13개 지역구, 그리고 경북의 19개 가운데 4~5석만 건지면 성공이라고들 했다. 그만큼 대구·경북의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신한국당이 잘못한 것도 많고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반감도 심했지만 집권 여덩이 임기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고 국정을 이끌어가려면 안정적 의석을 확보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새해가 밝자 각 당의 개편대회를 시작으로 바로 선거전이 불붙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지역구에 출마한 이상 최선을 다해 각 지역을 돌며 선거를 도왔다. 지금 생각해도 그대만큼 정성을 다해 선거를 지원한 것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강원·충청·대전 등 전국으로부터 선거 지원을 요청받았으며 시간 나는 대로 달려가 지원 유세도 했지만 선거 중반전부터는 전적으로 대구·경북에 매달려 총력지원을 했다. 각 지구당 개편대회를 시작으로 선거전에 돌입해서는 각 지역의 정당 연설회 등 대구 11군데는 물론 경북 19개 선거구를 평균 두세 번씩 돌아가며 지원 유세를 강행했다.
나는 가는 곳마다 대구·경북의 자존심을 강조했다.
“그동안 이 나라를 이만큼 키워온 것이 우리가 TK가 아닙니까. 서로 우리 TK를 이용하려 들지만 우리 TK정신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치는 정신입니다.”
그리고 “4·19의 도화선이 되었던 2·28을 통해 이 나라의 민주 발전을 주도했고, 새마을운동의 봉화를 높이 들고 경제 발전을 이룩한 주체가 바로 우리 대구·경북인 만큼, 그동안 정부에 섭섭했던 것은 모두 용광로 속에서 용해시켜 버리고 나라의 발전과 대구·경북의 미래를 위해 전진합시다”하고 역설했다.
4월 11일 총선 결과는 신한국당은 예상보다 많은 139석을 획득했다. 총 299석 중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우려하던 서울 27개 선거구 중 27곳에서 승리하는 등 선전을 하여 79석과 50석에 그친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에 비해 우위를 보였다. 그리고 내가 최선을 다해 지원했던 영남지역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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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대 총선 결과는 신한국당이 선전했으나 국민회의, 자민련 등 야당이 과반수를 당선시키며 여소야대 결과를 냈다 / 한편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당선권 밖의 전국구 순번으로 배수진을 쳤으나 낙선했다 (동아일보 1996. 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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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는 결구 2석(서구을-강재섭 姜在涉), 달성군-김석원(金錫元)밖에 건지지 못했지만, 경북에서는 19개 선거구 중 11개 지역에서 승리하여 경북 전역에 걸쳐 있는 힘을 다한 나로서는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15대 총선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은 경주시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거 다음 날인 4월 12일 혼자 경주역을 방문했던 일이다.
총선 유세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나는 경주역 광장에서 개최된 신한국당 경주시 정당연설회에 참석했다. 당시 신한국당 공천을 받고 출마한 황윤기(黃潤錤) 후보(경주시을 선거구)와 백상승(白相承) 후보(경주시 갑 선거구)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면서 ‘우리 당 후보가 당선되든 안 되든 경주시민 여러분에게 인사드리기 위해 선거 다음 날 반드시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개표 결과는 갑, 을 두 선거구에서 신한국당 후보가 모두 낙선하고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었다. 갑 선거구에서는 김일윤(金一潤) 후보, 을 선거구에서는 임진출(林鎭出)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 당 후보가 모두 낙선했지만 나는 누가 알아주든 말든 내 양심을 지키기 위해 경주로 내려갔다. 그래서 필요 없는 일이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선거 다음 날 나 혼자 경주로 내려간 것이다.
나는 선거 결과로 나타난 여소야대의 정국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경주역 광장을 한동안 혼자 거닐다가 경주에 왔다 갔다는 흔적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 역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내가 역장실에 들어서서 “경주시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고 이야기하자 경주역장을 비롯한 역무원들은 ‘이런 정치인도 있구나’ 하고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역장실에서 녹차 한 잔을 얻어먹고 서울로 떠나려고 하자 직원 한 사람이 자기 승용차로 나를 대구 동촌공항까지 손수 태워주었다. 지금도 나는 그 직원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항상 ‘아무리 하찮은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왔으며, 특히 정치인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만연하는 정치 불신도 따지고 보면 정치인들이 약속을 안 지키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나는 그때 내가 경주에 내려갔던 일을 지금도 마음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