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총선이 끝나자 정국은 바로 다음해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로 치달았다. 총선에서 139석밖에 얻지 못한 신한국당은 여소야대의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대대적인 무소속 의원 영입을 강행했고, 이에 반발한 야당의 실력 저지로 두 달 가까이나 국회 개원을 하지 못하는 등 1996년의 정국은 출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96년 이후부터 김영삼 대통령 정부와 여당이 때 이른 ‘레임덕’ 현상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여당의 대권 경쟁이 너무 빨리 불붙었기 때문이었다. 정국은 어느 것 하나 정부·여당의 뜻대로 풀려나가는 것이 없었고, 그동안 거품 조짐을 보여 오던 경제에도 점차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당의 조기 대권 경쟁은 15대 총선을 전후해 김영삼 대통령이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여러 개혁 정책의 반작용으로 인한 민심 이반과 이에 따른 6·27 지방선거 참패를 겪어야 했던 여당이 갑작스런 인기 하락에 직면하자 총선을 앞두고 김 대통령은 부랴부랴 외부 인사 영입을 서둘렀다. 이회창·이홍구李洪九 전 국무총리를 입당시키고, 국무총리에는 이수성(李壽成) 서울대 총장을 임명했다. 또 당시로는 비교적 대중적 인기를 지니고 있던 박찬종(朴燦鍾) 씨까지 신한국당의 울타리 안에 불러들였다.
이회장 전 총리를 중앙선대위 의장에, 그리고 박찬종 씨를 수도권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내세워 그들의 참신한 이미지를 십분 선거에 활용함으로써 총선에서의 참패는 모면했을지 모르지만 후계 구도는 그때부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회창, 이홍구, 그리고 박찬종 씨를 당에 영입할 때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똑같은 함량의 ‘장밋빛 꿈’을 심어줌으로써 차기 대권에의 욕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에 앞서 김 대통령은 이미 6·27 지방선거 얼마 후 일본 언론과의 회견에서 “다음 후계자는 깜짝 놀랄 만한 젊은 사람 가운데서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당시 여당의 참패 속에서도 거뜬히 경기지사에 당선된 이인제(李仁濟) 지사를 가리키는 듯한 인상을 주는 언급이었는데, 이 또한 김 대통령 스스로가 여당의 후계 구도를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이외에도 민주계 정권 재창출론을 앞세운 최형우·김덕룡(金德龍) 의원, 그리고 민정계의 대표주자 김윤환, 이한동 의원 등이 저마다 대권의 욕심을 감추지 않음으로써 대선 정국은 김 대통령과 신한국당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복잡하게 흘러갔다. 아무튼 총선이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15대 국회가 개원되었으나 여당은 집안싸움에 정신이 없었다. ‘7용’이니 ‘9용’이니 연일 언론이 부추기는 가운데 여당 안에서는 때 이른 대권 경쟁에 불이 붙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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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한국당 상임고문 시절 의원총회에서 나라 걱정으로 깊은 우려에 잠겨 있다 / 왼쪽부터 김명윤, 최형우, 권익현, 저자, 이한동, 이회창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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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15대 총선을 이끌었던 김윤환 대표 후임에 대학교수 출신의 이홍구 전 총리가 임명되자, 대권 경쟁은 총선 후 무소속에서 영입했던 의원들의 지구당 창당대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홍구 대표와 함께 당내 ‘7용’, ‘9용’들이 전국을 누비며 연설 경쟁을 벌였다. 정치 뉴스의 초점도 자연히 여당 내의 이들 대권 경쟁자들에게 모아졌다. 그 가운데서 영입파와 비영입파, 민주계와 비민주계, 그리고 영남권과 비영남권 등으로 나뉘어 밤낮없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회창 고문의 ‘패거리 정치론’ 때문에 민주계가 발끈했고, 이어 박찬종 고문이 이회창 고문에게 ‘군계일학연(群鷄一鶴然)’한다며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또한 김윤환 전 대표가 TK 대표로서 대권 도전을 공언해 오다가 막상 후보를 사퇴하면서 ‘영남 후보 배제론’이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도 그 무렵이었다.
급기야 김 대통령이 96년 8월, “독불장군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로 당내의 과열된 대권 경쟁에 쐐기를 박고 나섰지만 이미 한 번 불붙은 열기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때 당의 상임고문으로서, 그리고 국회의장까지 지낸 정계의 원로로서 깊은 우려에 잠겼다. 정치인에게 욕심이 없을 수는 없으며, 저마다 자신의 역량을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향해 펼쳐보려고 나서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나라 경제의 사정이 눈에 띄게 어려워져가고 누구 하나 책임지고 정국을 이끌어가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저렇게 10명에 가까운 대권 주자들이 나서 서로 소모적인 경쟁을 하는 게 과연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리고 집권 여당으로서 정권 재창출을 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조기 과열 경쟁이 과연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이러한 우려는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거품 경제가 극에 달하고 나라 경제 곳곳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6년 말 외채가 천억 불에 달했고, 그 천억 불의 외채 가운데 59%가 1년 안에 갚아야 할 단기 외채로서, 나라 살림은 그야말로 하루하루 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특히 1994년에 사정(司正)에 치중하여 무리하게 시행되었던 금융실명제는 오히려 총체적 경제 위기의 시발이 되었다 .실명제의 시행으로 중소기업은 갑자기 어음 할인이 되지 않아 자금난에 허덕였고 저축률은 땅에 떨어졌으며 과소비가 만연되어 너도 나도 해외여행이다, 자동차다, 외제사치품이다 하며 거품 경제의 극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