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가운데 1996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자정을 몇 시간 넘긴 추운 겨울 새벽 정부·여당의 무리수가 나왔다. 노동법과안기부법을 전격 날치기 통과시킨 것이다. 정부·여당의 노동법 개정안은 ‘복수 노조 허용’과 ‘정리해고’를 골자로 한 것이었는데 노사 양쪽 중 어느 측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한 설익은 상태였다.
물론 야당이 차일피일 대안을 내놓지 않았고, 구조조정이라는 경제 현실의 당위성은 있었다고 하나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노사간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않고 무리하게 힘으로만 밀어붙이려 한 여당의 경직된 정국 운영 방식이 화를 자초한 것이었다.
당시 정부와 노사 양측은 새해를 앞두고 원만한 타협을 위해 계속 협상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이동찬(李東燦) 회장 등 경총 간부들이 야당의 김대중 총재를 찾아간 자리에서 김대중 총재가 “야당도 1월 15일까지는 안을 내놓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으며, 정치권과 노사 양측이 조금만 더 인내를 갖고 계속 노력한다면 적어도 1월 중에는 타협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여당이 그 며칠을 기다리지 못해 스스로 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안기부법 개정안 역시 문민정부 들어 없앴던 수사권을 부활시킨다는 비판을 받는 무리한 법 개정이었다. 날치기 사회를 거부함으로써 국회의장직에서 일찍 물러났던 나로서는, 노동법 문제를 절대 무리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당 고문회의 등을 통해 누누이 강조했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26일 새벽, 야당이 모르는 가운데 여당만이 본회의에서 노동법 등을 전격적으로 날치기 통과시켰던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날치기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던 나는 ‘끝내 내 말을 듣지 않고 이렇게 하는구나’ 하는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나는 본회의장에 들어가기는 하되 끝내 여당 단족으로 법안을 처리하면 곧바로 퇴장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늦게 회의장에 들어서자 “이의 없습니까?”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세응(吳世應) 부의장이 방망이를 두들기고 있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나는 맨 뒤에 있는 내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멍하니 서 있다가 본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이홍구 대표가 내게 다가와 “그나마 잘되었지요”라고 야당과의 몸싸움 없이 처리를 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우울한 기분으로 의사당을 나오고 말았다.
여의도의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의사당 밖에 나서자 볼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내 가슴속은 ‘이제 정말 문민정부가 끝장이 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이날의 노동법 날치기 처리는 임기 후반 김 대통령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이때부터 문민정부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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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법 날치기 처리는 임기후반 김영삼 대통령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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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내가 이홍구 전 대표를 사석에서 만나 “그때 왜 그렇게 무리하게 강행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이홍구 대표는 “그때 청남대 후가를 다녀온 김 대통령이 어찌나 노동법 강행 처리를 독촉하던지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그간의 상세한 경위를 실토한 적이 있었다. 이홍구 대표는 그때의 노동법 강행 처리가 정치적으로 상처로 남아 결국 그 후 대권주자로서는 제일 먼저 후보 대열에서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노동법이 무리하게 날치기 통과되자 나라 안이 소용돌이쳤다. 1997년 새해 벽두부터 노동계가 들고일어나 총파업에 들어갔다.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남짓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여당은 이미 무기력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문민정부를 무너뜨린 결정타는 노동계가 아니라 재계에서 터져 나왔다. 다름 아닌 한보사태였다. 1월 23일 거대한 부실 덩어리인 한보철강은 채권 은행단이 요구한 주식 포기 각서 제출을 거부했다. 채권 은행단은 이에 따라 한보철강을 최종 부도처리하고 말았다.
한보의 부도는 한 재벌의 몰락이 아니라 나라 안에 정치·경제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자기자본이 고작 9백억 원에 불과했던 기업이 1994년 이래 물경 5조 원의 여신을 받은 데 따른 특혜 의혹이 그것이었다. 1997년을 온통 뒤흔들었던 한보 사태는 문민정부의 신경제정책이 최종 실패한 대표적 사례였으며, 정경유착의 곪은 상처를 한꺼번에 터뜨린 뇌관이었다.
모든 사람이 정태수(鄭泰守) 한보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정치인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정태수 회장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치권과 검찰 주변에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가 나돌았고, 이윽고 정치인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됐다. 정국은 심하게 요동을 쳤다. 그리고 마침내 문민 정권의 실세라던 홍인길(洪仁吉) · 황병태(黃秉泰) · 정재철(鄭在哲) 의원, 김우석(金佑錫) 내무장관 등 정·관계 실세들이 한보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대거 구속되고, 야당에서도 김대중 총재의 최측근인 권노갑(權魯甲) 위원이 구속되었다.
한보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홍인길 의원 입에서 “나는 깃털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왔고, 이에 따라 ‘몸통’이 누구냐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렸다. 한보사태의 여파는 결국 김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 씨에게 미쳤다.
소위 ‘김현철 사건’은 그렇잖아도 4월 대란설, 5월 대란설 등 다가오는 경제 위기에 불안해하던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결국 ‘아들의 잘못은 아비의 책임’이라는 김 대통령의 사과담화와 한보사태 TV 청문회를 거쳐 김현철 씨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나라 경제는 급락을 거듭했다. 한보사태 이후 하루에도 중소기업 수십 개가 문을 닫았고, 실업자가 급증하기 시작했으며, 어음 부도율이 연일 최악을 경신했다.
노동법 파동과 한보사태로 여당 내 대권 경쟁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양상이었을 뿐 한보사태가 대권 경쟁 구도에 변화를 몰고 오면서 경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